평화이음이 월간 '민족과 통일' 12월호를 발간했습니다. 우리사회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였고 비전향장기수로 총 27년의 감옥생활을 한 윤희보 선생의 구술을 연재한다. 윤희보 선생의 구술은 특히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어떤 활동을 하였고 박헌영, 이승엽 세력과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어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윤희보 선생은 1917년 10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당시 북으로 건너갔으며 2015년 3월 사망,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안재홍 선생
나를 지도해 줬던 분은 1937년 형님을 통해 만난 김영목 씨인데 고향이 평택군 고덕면 계루지입니다. 거기가 안재홍 선생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한동네죠.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선생이 다 유명한 한학자들입니다. 그분들이 이조실록이라든가 역사 편찬하는데 공이 많아요. 여기서는 한학 하면 정인보 선생이 제일 유명하고, 홍명희 아들 홍기문 씨도 유명한데 안재홍 씨도 대단히 뛰어납니다. 홍명희 선생은 문학에 조예가 깊고 유명한 작품 쓰면서도 한학에서는 조선사람 중에 일인자 몇 사람에 듭니다. 그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역사 편찬하는데 한문에 조예가 깊기 때문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고 내가 들었어요. 안재홍 선생은 처음 건준 만들 때 부위원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박승극 선생(일제강점기 수원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이나 김영목 선생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한 부락에 살았으니까. 원래 민족주의자가 쉽게 사회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구태여 사회주의로 끌어들이지 않고 통일전선에 망라했습니다. 그런데 안재홍 씨는 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북으로 건너가 재북평화통일위원회에 관계를 했습니다. 아무튼 마지막 생활을 잘 했습니다. 안재홍 선생 밑에 안정용이라고 아들이 있었습니다. 보성전문학교를 나와 가지고, 유한양행 다닐 적에 그때 내가 만난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북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빛을 발할 수가 없었어요. 직장 같은 것도 구차했을 거예요. 그래서 잡혀있을 적에 돈 15원인가, 뭐 20원인가 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힘들게 살았고 말년에 너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안재홍 씨가 5형젠인데 큰 형은 죽었고, 안재학은 독일 가서 공학 전공을 했는데 내가 몇 번 만났고, 안재준이라고 중앙고보에서 기하를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그 집안이 민족주의 집안이었는데 그 아들 대에 내려와서는 사회주의자들이 관계한 게 있어요. 해방 후에도 우리와 관계한 사람도 있어요.
나경석과 나혜석
나경석(1890~1959년. 독립운동가, 교육자) 씨가 수원 사람이에요. 호흡기 질환이 있어서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몇 번 만난 일이 있어요. 이 분은 해방 후에 자기 집에 들어와 가지고 자기 토지를 다 나눠줬어요. 토지 분배 마냥 다 나눠줬어요. 돈 가지고 있던 거 다 나눠주고. 그런데 사회주의에 관계됐는지는 잘 몰라요. 물산장려운동 하는 민족주의자인줄 알았지. 나중에 러시아에서 코민테른 문서가 공개되면서 상해파 공산당 초기 책임비서가 나경석 씨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그 누이가 화가 나혜석 씨인데 결혼을 잘못했어요. 김우영(나혜석 남편)이 하고 불행한 것도 내가 알죠. 나혜석 씨는 몇 번 만났고 집에도 몇 번 갔고, 나혜석 그림을 병원에 붙이기도 했어요. 한 서너댓살 되는 아들도 있었는데 당시에 함께 살지 않고 가끔 업고 오더라고요. 나 씨 집안은 지역 유지였지만 나혜석 씨가 불우하게 사는 걸 알면서도 안 돌봐줬어요. 왜냐면 친일파 최린하고 사귀었으니까. 김우영이란 놈도 친일파에요. 해방 전에 천명을 했어요. 그래서 나혜석 씨는 화가 시절에 수전증이 있어서 손을 떨었어요. 떨면서도 그림을 그려서 한 장에 백 원, 50원 이렇게 팔았는데, 안 팔릴 적도 있고, 필요해서 생활을 그렇게 하더구만. 아들은 가끔 옆에 와서 자기 어머니 만나고 가는 거고, 나경석 동생이 나중석 씨입니다(실제로는 나중석 선생이 나경석 선생의 사촌형임-편집자 주). 이분은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 서탑에서 고무공장을 했어요. 고무신도 만들고. 나 씨 집안과 한계창 씨가 가까웠는데 그래서 한 씨가 고무공장을 종종 다녀왔는데 아주 노랭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다녀오면서 만주 들러서 소문을 전해듣고 와서는 나에게 빨치산 얘기를 해줬습니다. 김일성 장군 이야기, 항일 무장투쟁 이야기, 신출귀몰해서 일본군 신나게 부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승리에 대한 신심을 나한테도 일러주고 그랬어요. 그때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지만 민족감정은 아주 대단했어요. 1941년에 민족운동 사건으로 나중석 씨의 아들이랑 가족친척 여럿이 수원경찰서 4감방에 들어갔어요. 나는 그 뒤에 1943년에 조선문제 사건으로 같은 4감방에 들어갔습니다. 가보니까 감방 벽에 시를 파 놨어요. 아마 나경석 씨 아들일 거야. 아무튼 나중석, 나경석 이 분들은 우리랑 직접 관계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들은 우리랑 관계했어요.
2달 만에 용정 대성중학에서 돌아오다
병원에서 일 하면서 학교에 위생사로 치료를 나가는 식으로 돈을 6~7백 원을 모았어요. 학교에 가려고. 그때 한계창 동지가 중국 용정 대성중학을 추천했어요. 빨치산도 가깝고, 좋은 선생님도 있고, 좋은 학생들도 많다고. 그런데 두 달 만에 돌아와서 별로 할 얘기가 없어요. 거기에 김호련 선생에게서 두 달 간 영어 몇 번, 지리 몇 시간 공부한 것밖에 없어요. 나중에 1937년에 김영목 씨에게 이야기하니까 그분이 김호련이 아니라 김규갑 선생이고 우리 동지다, 집이 여기고 동생이 김부갑으로 양복점을 크게 한다고 알려줬어요. 해방 후에도 광목 다루는 협동조합 일을 같이 했습니다. 두 달 만에 오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내 형님 친구 중에 심 모라고 있는데 갑자기 용정에 형님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심 모가 회사에서 돈을 크게 축내가지고 징역에 가게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학비로 쓰려고 모아둔 6백 원을 줘서 메꿔줬습니다. 그때는 심 모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줄 착각했거든요.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돈에 겁이 없어요. 참 단순하죠. 그때 용정에서 쌀 한가마에 10원을 안 해요. 하숙비가 10원이고. 그러니까 5년 어치 하숙비를 준거죠. 그런데 심 모가 돈을 갚지를 않았습니다. 학비가 없으니 학교를 다닐 수가 없죠. 그 심 모는 지금도 남쪽에 살지만 날 만나기 꺼려해서 안 만나요. 이름도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심 모의 동생을 내가 지도했는데 한국전쟁 때 후퇴를 못해서 죽었습니다. 아무튼 경력이 있으니까 다시 병원에 가서 일을 해서 돈을 모으려고 했는데 형님이 병이 났습니다.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아주 심했어요. 어지간하면 내가 고칠 수가 있는데 당황하고 도리가 없었죠. 형님은 성질이 급합니다. 나랑은 다르죠.
보천보 사건과 ‘김일성 장군’
제가 16살 무렵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흔히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를 국내 언론이 보도하면서 ‘김일성 장군’이 널리 알려졌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그 전에도 신문에 나왔습니다. ‘김일성 부대’, ‘김일성 비적’ 이런 식으로 해서 어디서 무슨 투쟁을 했다, 이런 보도들이 나왔고 그걸 봐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 입에서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대성학교를 갔다 온 다음에 보천보 사건이 났고 그 후에 사회주의 책이 막 쏟아집니다. 그 전까지는 그냥 위축돼가지고 있었는데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사건 소식을 듣고 국내 일꾼들이 다시 기운을 냅니다. 그전까지는 책도 쉬쉬하고 내놓지 않았어요. 몰래 감춰둔 겁니다. 그러니까 1931년 이후에 퇴조기로 들어가서 1937년 보천보 사건으로 해서 다시 앙양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보천보 소식을 듣고 여운형 선생도 “조선 민족은 죽지 않는다. 술을 받아오라”라고 해서 그분이 원래 집에서 술을 안 드시는 분인데 기뻐 가지고 술을 마시고 백두산 전적지를 훑어보러 가셨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다시 일꾼들이 기운을 낸 거죠. 저도 그 즈음에 그런 책들을 받아서 봤습니다. 그때는 영등포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업단지였죠. 경인 일대에서 영등포 공장지대, 인천, 부평 그리고 뚝섬 쪽에 마포, 그 중에서 제일 우월한 게 서울에서는 영등포 공장지대하고 경전하고, 철도예요. 거기서 1937년에 책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던 서클을 만났어요. 그래서 거기서 책이 막 나오는데, 책을 나에게 주기만 했지 내가 그 책을 어떻게 공부를 해 가지고 소화를 시키는가에 대한 조직을 못 해줬어요, 선배들이. 그러니까 나는 나름대로 그걸 봤는데 힘든 거는 한두 번 보고 마는 거예요. 수월한 거, 문학 소설, 비교적 내가 알기 쉬운 거를 주로 봤죠. 그때 소련 사람 비아드니스키의 조직론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어요. 그것도 봤죠. 이렇게 여러 책들이 나한테 들어왔어요. 그 때 내가 21살이었어요. 책이 수십 권이에요. 중요 저서는 다 가지고 있었어요. 그 중 『조선문제』라고 고경흠이가 쓴 게 있습니다. 그 책에 실린 것 중에 중요한 게 ‘12월 테제’입니다. (조선공산당은 1928년 7월부터 9월까지 열린 코민테른 6차 대회 46차 회의(9월1일)에서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정식 승인을 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취소되었다. 코민테른은 지부 취소와 함께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12월 테제)를 발표하고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파벌투쟁을 극복하고 대중에 기초한 당을 재건할 것을 지시했다. ) 그리고 쿠시넨의 서한도 거기 있습니다. 이 책 말고도 『레닌 선집』, 『스탈린 선집』이 다 이때 나왔습니다. 일어판으로요. 『막심 고리끼』, 『노신 전집』, 『아큐정전』 이런 문학 서적은 읽기가 좀 나아요.
금지서적 때문에 체포되다
그런데 그 『조선문제』 때문에 내가 1943년 체포됩니다. 그 책은 출판되자 바로 발매금지가 됐는데 제가 책을 받아보니 ‘박승극 장서’라고 써 붙인 게 있어요. 그래서 그 표식을 떼서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수원으로 가서 들통이 났어요. 체포돼서 어디서 책을 구했냐고 일주일 동안 때리기만 하는 거야. 나는 그냥 서점에서 샀다고 꾸며댔습니다. 발매금지 됐어도 큰 서점에서는 파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디서 받은 게 아니고 산 것이고, 내용도 본 일 없다, 그냥 부탁받아서 서울에서 사서 수원에 가져온 것이다, 내가 민족감정은 있었기 때문에 조선사람으로서 내가 봐야 될 것 같아서 샀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때는 내가 민족주의자로 행세했죠. 아마 누가 밀고해서 탄로난 게 아닌가 짐작해요. 수원에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수원에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난 사실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거기 정만화라는 아동 시인이 있었어요. 해방 후에 구역당 기관지에 몇 번 실린 적도 있어요. 좋은 시를 많이 썼어요. 노동하면서 성장해 가지고 나와 같은 비밀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서 탄로가 난 거 같아요. 그 사람이 나보다 이틀 먼저 들어갔어요. 그 사람이 수원에서 격문을 붙였는데 그게 탄로 나는 바람에 수색을 당했습니다. 그 때 그 책이 나왔는데 거기 내 주소가 적힌 편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어요. 우리 집에 한계창 동지가 왔다가 한계창 동지도 잡혔어요. 그 때가 1943년입니다. 정만화는 80일 만에 나오고 나는 78일 만에 기소유예로 유치장에서 나왔어요. 그때 아마 한 만 원 썼을 거예요. 주인이 와 가지고 막 썼으니까. 야마꾸제라는 왜놈 간수가 술을 좋아했는데 술도 들어오고 나한테 설렁탕도 막 들어오더라고. 홍길선 씨라고 수원에 유명한 인텔리가 있었습니다. 광주 학생 사건으로 학생시절 무기정학 받아서 일본 가서 공부하다가 졸업한 후 징역도 살고. 그 홍길선 씨 주변에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홍 씨의 사촌인가 육촌인가가 경방단장이었는데 이 사람을 통해서 돈을 써서 풀려났습니다. 당시에는 돈을 쓰면 사건을 확대하지 않고 풀어줬습니다. (경방단은 1937년 일본이 화재 방지를 위해 만든 조직으로 유사시 치안 확보, 한국인 감시 등에도 동원되었다.) 아무튼 그때 나에게 책을 준 사람이 김영목이란 분입니다. 그 부인이 임순덕이었죠. 김영목은 해방 후에도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고 그 바람에 더 활동은 안 했어요. 그래도 내가 1963년에 나와서 만나니까 잘 대해줬어요. 그러다 1974년에 또 체포되는 바람에 확 달라졌습니다. 그때 감찰 뭐 그런 거 생기기 전에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 내가 해이해져 가지고 그게 흘러나갔어요. 1974년에 잡혀서 4년 형을 받았어요. 그런데 김영목이 사실은 뒤에서 나를 빼내려고 하신 거예요. 방송 들은 거, 몇 마디 한 거는 아무 문제될 게 아니라서 전향 하고 나오라는 것이죠. 김영목은 너무 현실과 타협하는 게 많았어요. 그래서 내 아내한테 ‘늙어가지고 전향이라도 하고 나오지 뭐 거기서 그러고 있냐’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전향은 안 하겠다 해서 징역을 산 거죠. 3심까지 변호사 다 댔는데 7년 구형에 4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6년 11월 3일 대구로 갑니다. 거기서 최하종 선생을 처음 만났죠. 한 2년 반 가량 대구에 있다가 4년 다 살고 감호소로 간 거죠. 감호소에서 11년을 살고 15년 만에 나오니까 그분들이 다 돌아가신 거죠. 김영목과 부인 임순덕, 이 두 분이 어쨌든 내가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나보다 10살 위예요. 부인도 10살 위고. 아무튼 그 때 김일수 동지를 비롯해서 이 분들이 이제 몸이 달은 거야. 내가 불면 어떡하나. 그런데 별일 없이 나오니까 윤희보는 믿을 만하다 이런 생각을 준 거죠.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윤희보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단체 인물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