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박영진 열사의 분신항거 2. 고강도 착취가 자유화되었다 3. 계급적 적대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총파업투쟁 4.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의 총적 목표 5.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과 자주통일국가 건설
1. 박영진 열사의 분신항거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1986년 4월 어느 날 서른 한 살의 청년이 격정에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그가 읽던 신문지 위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1986년 3월 25일 서울노동운동연합이 발행한 <노동자신문>이었다. 신문이라기보다는 유인물처럼 보이는 신문에는 이런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신흥정밀 박영진 동지, 임금인상투쟁 중 분신항거! ‘임금인상하라’ 처절한 외침과 함께 온몸에 불붙이다 3월 18일 새벽 3시 동료들의 오열 속에 끝내 숨지다
35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청년운동단체 사무실에서 <노동자신문>에 실린 박영진 열사의 분신항거소식을 읽으며 격정의 눈물을 흘리던 서른 한 살의 청년이 바로 나였다. 박영진 열사의 분신항거는 나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차별하는 낡고 썩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겠노라고...
1986년 3월 17일 신흥정밀 노동자들은 식당에서 성명을 낭독하고 투쟁구호를 외쳤다. 식당으로 쳐들어온 경찰이 그들을 덮쳤다. 경찰의 폭행에 맞서 싸우던 노동자들은 옥상으로 밀려갔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박영진 열사가 자기 온몸에 석유를 쏟아 부었다. 불이 붙은 성명서를 손에 움켜쥔 그가 울부짖었다.
경찰은 물러나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그의 울부짖음은 노동자들의 아우성 속에 파묻혔고, 곧바로 그의 온몸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얼마 후 전신화상을 입고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기 된 박영진 열사가 병상에 말없이 누워있었다. 그의 삶을 26년 동안 지켜주던 생명지표가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각일각 다가서고 있었다. 화염 속에서 일그러진 그의 입술이 가늘게 움직이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물 좀 줘요. 마시지 않을 테니까. 입술에 묻히게만 해줘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그의 곁에 있었다. 차마 유언으로 들을 수 없는 가슴 아픈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난 동일제강에서 해고되었고, 중학교 3년 중퇴하고 가난하게 살았어요. 신흥정밀은 하루 9시간씩 기본으로 일하고 3,280원을 줬어요. 너무도 살기 힘들어 임금인상하려고 했는데... 지금 빨리 가고 싶어요. 가면 쉬겠죠. 우리 부모님은 우성아파트에서 청소부 일을 하고 있어요. 어머님이 이 일을 천만 노동자에게 꼭 전해주시길...”
박영진 열사의 숨소리가 끊어졌다. 통곡소리가 작은 병실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어언 35년 세월이 흘렀다. 박영진 열사의 26년 생애보다 더 긴 35년 세월 속에서 차츰 희미해져가던 기억이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노동자들의 현실 속에서 되살아났다.
2. 고강도 착취가 자유화되었다
박영진 열사가 분신항거로 희생된 이후 35년이 지난 오늘 그 무슨 ‘민주화’가 실현되었다고 하는데도, 1인당 국민총소득(GNP)이 30,000달러를 넘어섰다고 하는데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여전히 실업과 빈궁,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참담한 현실 속으로 떠민 근본요인은 착취와 복종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착취는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발생하는 반사회적 행위를 뜻한다.
생산은 노동계급의 생산로동에 의해 사회적으로 진행되지만, 생산과정에서 창조된 가치는 자본가계급이 반사회적으로 점유한다. 이것이 착취의 실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생산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생산로동으로 창조한 가치의 전부를 극소수 자본가계급이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반사회적 행위가 바로 착취인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은 자기들이 배타적으로 점유한 가치 중에서 일부를 떼어내 자기들이 고용한 노동계급에게 임금(wage)이라는 명목으로 분배함으로써 착취의 지속성을 유지한다.
착취계급이 모든 사회적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점유한 자본주의사회체제는 인간을 고용시장에서 거래되는 비인격적인 상품으로 전락시켜 인간의 존엄과 자주성을 짓밟는다. 극소수 착취계급은 절대다수 노동계급을 노동상품으로 구매하고, 그들에게 착취제도에 복종하라고 강제한다. 착취제도에 복종하지 않는 노동자는 ‘갑질’을 당하거나, 차별을 받거나, 정리해고를 당한다.
극소수 자본가계급이 절대다수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그들을 착취제도에 복종시키는 반사회적 범죄를 합법화해준 것이 자본주의사회체제다. 자본가계급은 인류역사에 마지막으로 출현한 착취계급이다.
사회적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점유한 자본가계급과 사회적 생산로동을 담당한 노동계급은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되며, 그런 계급적 대립 속에서 자본주의사회체제의 내부모순이 발생한다.
자본주의사회체제의 내부모순이 주기적으로 심화되면서 파산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착취계급은 파산위기에서 발생한 모든 고통과 불행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전부 떠넘긴다. 그렇게 되면, 생존위기로 내몰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투쟁에 나서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착취계급은 자기들의 착취를 합법화해준 정권과 결탁하여 착취강도를 약간 낮춰주는 시늉을 하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회유하고, 생존권쟁취투쟁이 격화, 폭발되지 않도록 방지한다. 1996년 5월에 설립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그런 회유정책의 추진자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노사정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1997년 12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파산위기가 닥쳐왔을 때, 착취계급과 결탁한 정권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합법화해주었고, 수많은 노동자를 실업과 빈궁으로 내몰았으며, 착취계급은 착취강도를 이전보다 더욱 높였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장장 24년 동안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고강도 착취는 완화되기는커녕 점차적으로 강화되어왔다.
요즈음 서울에서 평양랭면 평균가격이 11,000원인데, 착취계급과 결탁한 정권이 정해놓은 최저임금은 시간당 8,590원이다. 그나마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혹심한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는 319만명에 이르렀다.
착취강도가 높아질수록 부익부 빈익빈 추세에 따라 사회적 빈부격차는 극대화되었고, 공룡처럼 비대해진 투기자본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을 장악했고, 불로소득과 불법금융거래와 부정부패가 만연되었다. 부동산개발에 광분하는 자본가들이 천문학적인 개발리익을 정치인들, 관료들과 나눠먹은 대장동 사태가 그런 범죄사례이다.
자산격차는 그만두고 소득격차만 봐도, 한국 사회에서 최상위 자본가들은 정규직 노동자보다 39배 더 많은 소득을 거머쥐고,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74배나 더 많은 소득을 거머쥔다. 856만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간 평균임금은 약 2,000만원밖에 되지 않는데, 소득분포에서 상위 0.1%에 해당하는 최상위 자본가 24,149명의 연간 평균소득은 약 15억1,700만원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전년에 비해 2.2% 늘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전년에 비해 1% 줄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감소한 것은 2004년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에 관한 통계를 작성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악랄한 착취제도에 복종을 강요당하며 고통과 불행을 겪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계급의 41.6%를 차지한다.
자본주의사회체제의 내부모순이 심화되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대류행 사태까지 겹치는 바람에 지금 한국 경제는 성장을 멈추고 파산위기에 빠졌다. 파산위기가 몰려오자 다급해진 자본가계급은 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를 이전보다 더 많이 고용함으로써 착취강도를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2020년 10월 27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고용계약기간이 정해진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는 133,000명이 증가했고, 주당 36시간만 일하는 시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는 97,000명이 증가했고, 파견-용역-특수형태 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28,000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처럼 광란적인 고강도 착취를 법적으로 통제(control)하기는커녕 되레 자유화(liberalize)해준 것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다.
3. 계급적 적대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총파업투쟁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항거로 희생된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착취제도에 맞서싸우기 위해 분신항거의 길을 택했다. 노동자의 분신항거는 노동계급이 자기의 집단력량을 아직 조직화하지 못하고, 단위사업장별로 분산되어 투쟁하는 시기에 벌어지는 계급투쟁(class struggle)의 초기 형태다. 노동계급이 아닌 농민과 영세자영업자를 비롯한 근로대중은 생존권쟁취투쟁에 나서지만, 노동계급은 계급투쟁에 나선다. 여러 형태의 계급투쟁 가운데서 가장 위력적인 계급투쟁이 전국적 범위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총파업이다. 총파업은 노조로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전개하는 계급투쟁이다.
그런데 착취계급과 결탁한 정권과 언론은 계급투쟁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기피어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갖지 못하도록 계급투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계급투쟁이라는 말은 19세기 중엽 유럽의 공산주의운동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 유럽의 공산주의운동을 이끌던 칼 맑스(Karl H.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1848년 영국 런던에서 공산당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을 출판했는데, 공산당선언 제1장은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The history of all hitherto existing society is the history of class struggle.)"
흔히 계급사관이라고 부르는 사회역사리론이 정립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73년 전이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1780~1812)가 농민전쟁을 일으킨 때로부터 37년 뒤, 유럽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인식한 계급사관의 명제를 정립했던 것이다. 홍경래는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지만, 맑스와 엥겔스는 홍경래의 농민전쟁을 계급투쟁의 역사 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맑스주의 계급사관에 따르면, 홍경래의 농민전쟁은 당시 피착취계급이었던 농민들이 봉건착취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궐기한 격렬한 계급투쟁이었다.
조선봉건왕조의 착취세력은 홍경래의 농민전쟁에 참가한 농민들 가운데서 2,000여 명을 살해하여 농민전쟁을 압살했고, 유럽의 착취세력은 체포, 투옥, 해외추방 같은 폭력조치를 동원하여 맑스와 엥겔스가 이끄는 공산주의운동을 짓밟았다. 그런 무자비한 탄압이 1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안, 계급투쟁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기피어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착취세력이 금압한다고 해서 계급투쟁이라는 언어가 노동계급의 정신세계에서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억제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극소수 자본가계급이 절대다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차별하는 자본주의사회체제에서는 계급적 적대관계(class antagonism)가 필연적으로 형성되고, 계급적 적대관계는 불가피하게 물리적 충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총파업은 계급적 적대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인 것이다.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첫 번째 총파업은 1946년 9월 조선로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벌인 총파업이다. 전평 산하 철도노조 40,000명 노동자가 시작한 파업투쟁은 38도선 이남 전역에서 15만명 노동자가 참가한 총파업투쟁으로 확대되었다. 1946년 당시 전평에 소속된 노동자는 57만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15만명이 총파업에 참가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전평이 9월 총파업에서 제시한 투쟁목표다. 9월 총파업의 투쟁목표는 전평 산하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1946년 9월 26일에 발표한 총파업 선언서에 명시되었다. 9월 총파업의 투쟁목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2)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3)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줄 것.
4) 공장폐쇄와 해고를 절대 반대한다.
5)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를 보장하라.
6) 일체의 반동적 테러를 배격할 것.
7)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8) 민주주의운동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9)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운동가를 즉시 석방하라.
10)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12)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미군정 점령 하에서 모진 탄압을 뚫고 계급투쟁을 전개하던 전평은 이승만 우익독재정권이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그 정권에 의해 강제해산당했다.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두 번째로 벌어진 대규모 총파업은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전개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총파업이다. 당시 민주노총이 총파업에서 제기한 투쟁목표는 노동악법을 전면 무효화하고, 즉각 재개정하라는 것이었다.
김영삼 정권 시기의 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 새벽 야음을 틈타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더니, 6분 만에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폭거를 자행했다. 그들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노동법 개정안에는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대체근로제 등이 들어갔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계급적 착취를 합법화하여 착취강도를 이전보다 더 끌어올린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이에 격분한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총파업투쟁에 궐기했다.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에 1일 평균 163개 노조와 18만4,500명 노동자들이 참가했으며, 3차에 걸친 총파업투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총 39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총파업투쟁에 놀란 김영삼 정권은 폭력경찰을 동원하여 최루탄을 난사하고, 백골단을 앞세워 야만적인 폭행을 가하면서 민주노총 총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오늘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세 번째로 기록될 총파업이 눈앞에 다가왔다. 2021년 8월 23일 민주노총은 화상회의방식으로 진행된 제73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소속 110만 명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결의하는 단독안건을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총파업 투쟁목표를 채택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은 2021년 10월 20일로 예정되었다. 민주노총이 10.20 총파업을 결의하면서 제시한 15개조 투쟁목표는 다음과 같다.
1) 고용위기에 빠진 기간산업(자동차, 조선, 항공, 에너지)을 국유화할 것.
2) 전체 주택의 50%를 국유화하여 주택문제를 해결할 것.
3)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입시제도 및 대학서열을 폐지하여 학벌사회를 타파할 것.
4) 공공의료를 확충하고 보건의료인력을 확충할 것.
5) 100만명 노동자가 일하는 돌봄서비스부문을 국가가 직접 운영할 것.
6) 재난시기(코로나위기, 기후위기, 인구감소위기 등)에 해고를 금지하고, 산업재편시(4차 산업혁명)에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위해 노동자와 고용자가 공동으로 결정하게 할 것.
7) 상시지속업무에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고, 비정규직법을 폐지할 것.
8) 부동산투기소득에 대한 과세를 확대할 것.
9) 재벌개혁(범죄수익 국고환수)과 부자증세를 시행할 것.
10) 사회임금을 확대하여 상병수당, 국민연금 소득대체 50%, 전국민고용보험제를 실시할 것.
11)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재난생계소득을 지급할 것.
12)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과 중대재해기업차별법을 적용할 것.
13) 노동자-고용자성 확장 등 세계노동기구 협약을 비준하고, 그에 따라 노동법을 전면 개정할 것.
14)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안전한 일터와 일자리를 확대할 것.
15)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및 정치활동권을 보장할 것.
4.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의 총적 목표
민주노총이 결의한 10.20 총파업투쟁의 총적 목표는 불평등한 체제를 타파하고 사회적 대전환을 이루어내려는 것이다. 2021년 9월 30일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서울을 비롯한 29개 지역에서 총파업결의대회를 동시다발로 진행하면서 “총파업으로 불평등체제 타파하고 사회의 대전환을 실현하자”고 외쳤다.
위에 인용한 민주노총의 10월 20일 총파업 투쟁목표 중에서 주요산업 국유화, 전체 주택 50% 국유화, 무상교육제 실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기업운영제 실시, 비정규직 폐지, 노동자해고금지, 재벌개혁과 부자증세, 전국민고용보험제 등은 불평등한 체제를 타파하고 사회적 대전환을 이루어내기 위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정치강령들이다.
민주노총이 말하는 불평등한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절대다수 노동계급에 대한 극소수 자본가계급의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합법화, 자유화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극대화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체제이므로, 민주노총이 타파하려는 불평등한 체제는 곧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해석되는 것이다.
민주노총 강령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참된 민주사회를 건설한다”고 명시되었다. 민주노총이 건설하려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참된 민주사회”는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선 참된 민주주의가 구현된 새로운 세상을 의미한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 보장되는 참된 민주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훼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정치리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대안개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헐벗 크롤리(Herbert D. Croly, 1869~1930)다. 그는 1915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리념을 세계정치무대에 제기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급속히 추진되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억압, 착취, 차별이 극심했던 20세기 초 미국에서 크롤리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시한 것이다.
크롤리가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정치리념은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크롤리가 미국식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시했다면, 항일투사 조소앙(1887~1958)은 우리식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그가 반일항쟁기에 정립한 우리식 진보적 민주주의가 바로 삼균주의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1941년 11월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강령에 전면적으로 반영되었다. 건국강령에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8대 강령이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1) 주요산업 국유화 - 주요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은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한다.
2) 일제와 친일부역자의 재산몰수 및 국유화 - 일제가 점유한 모든 사유자본과 친일부역자가 소유한 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
3) 몰수재산의 사회적 환원 - 몰수한 재산은 빈공, 빈농 및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국영 혹은 공영의 집단생산기관에 충당함을 원칙으로 한다.
4) 토지의 국유화 - 토지의 상속, 매매, 저압, 전양, 유증, 전조차를 금지한다.
5) 국제무역 및 사회간접자본의 국유화 - 국제무역, 전기, 수도, 대규모 인쇄소, 출판, 영화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한다.
6) 노동조건 개선 - 노동, 유공, 여인의 야간노동을 금지하고, 연령, 지대, 시산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한다.
7) 무상의료제 실시 - 농공인의 면비의료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과 건강을 보장한다.
8) 토지개혁 실시 - 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나누어줌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 자작농, 소지주농, 중지주농 등 농인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준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실현하는 정치리념은 진보적 민주주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지난날 상해 임시정부는 오늘 민주노총이 제시한 총파업 투쟁목표보다 한 걸음 더 앞서나간 진보적인 건국강령을 제시했다.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었으므로, 한국 정부는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해야 마땅한데, 진보적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미국에서 이식된 자유민주주의를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져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1945년 8.15 해방 이후 건국리념으로 정립되었다. 1945년 10월 3일 김일성 주석은 평양로농정치학교 학생들 앞에서 진행한 강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조선이 나아갈 길은 참다운 민주주의인 진보적 민주주의의 길입니다. 이 길 만이 우리 인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주고 행복한 생활을 마련하여 줄 수 있으며 나라의 완전자주독립을 보장하여 줄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진보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합니다”라고 언명하였다.
2007년 6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평가포럼 월례강연에서 “내실이 있는 민주주의는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입니다”라고 언명한 바 있다. 이 발언을 들어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진보적 민주주의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크롤리가 말한 진보적 민주주의, 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명시된 진보적 민주주의, 김일성 주석이 건국리념으로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일맥상통하는 정치리념이다.
5.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과 자주통일국가 건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1941년 11월 상해 임시정부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제시했고, 1945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리념으로 제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역사적 사실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건국문제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40년대에 일제의 식민통치체제를 타파하고 건설하려 했던 자주독립국가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새로운 나라였던 것이다.
일제식민지시대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임무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 임무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오늘 분단시대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임무와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 임무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분단체제를 타파하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구호에 나온 것처럼 불평등한 체제를 타파하고 사회적 대전환을 실현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불평등한 체제를 타파하고 사회적 대전환을 실현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10.20 총파업의 투쟁목표로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강령에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민주노총이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과 자주통일국가 건설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전일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역사적 대전환에서 선후차를 따져보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다음에 통일국가가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자주통일국가가 건설된 다음에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정부가 자주통일국가의 남측 지역에 수립되어 불평등한 체제를 타파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2021년 10월 20일 총파업의 날이 밝으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투쟁의 깃발을 들고 광장과 거리로 나설 것이다. 이번에 민주노총이 준비한 총파업은 1946년 9월 총파업, 1996년 12월~1997년 1월 총파업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로 전개되는 총파업이다. 이에 놀란 문재인 정부는 ‘불법집회’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했고, 총파업 집회를 불허한다는 탄압경고를 냈지만, 계급투쟁의 불길은 다시 타오를 것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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