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삼팔선은 누가 그었나?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요시하여 이미 1943년 3월 27일 미‧영‧중 수뇌가 모인 카이로 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반도를 신탁통치 할 것을 논의하였다.
1943년 12월 테헤란 회담에서 다시 루스벨트는 40년간의 후견을 주장했다.
1945년 2월 8일 얄타 회담에서는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1878~1953)에게 정식으로 미‧소‧중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20~30년으로 제안했다.
1945년 7월 17일부터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도 역시 미국은 한반도 지배를 위하여 국제 공동관계로서의 신탁통치안에 한반도를 묶어두려고 애썼다.
이 즈음 루스벨트가 죽고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으로 대통령이 바뀌었고, 태평양전쟁이 종결로 치닫으면서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파죽지세로 독립군인 조선인민혁명군과 함께 만주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가까워 오자 미 국무부는 3성 조정위원회에 명령을 하달하여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대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성 조정위원회 산하 극동소위원회에서는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1909~1994. 훗날 국무장관이 된다), 맥 클로이(John Jay McCloy, 1895~1989), 랠프 바드(Ralph Austin Bard, 1884~1975), 보네스틸(Charles Hartwell Bonesteel III, 1909~1977, 훗날 주한미군사령관이 된다), 제임스 던(James Clement Dunn, 1890~1979) 등 대령급이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장시간에 걸쳐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논의하게 되었다.
미국은 아직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주력부대가 오키나와에 있어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벽걸이 지도를 책상에 펴놓고 고심한 끝에 북위 38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 버렸다.
그 당시 38선 이북은 만주국 관할이었고 38선 이남은 일본 대본영 관할이었는데 이것이 미국의 분할선으로 이용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일반명령 1호에 삽입시켜 맥아더 사령부를 통하여 백악관에 전달했고 스탈린에게 통고하여 스탈린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한반도는 우리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반으로 조각나고 말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38선을 그었을까?
이전부터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미국의 야욕이 소련과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해 와해할 것을 우려해서, 늦었지만 한반도의 반이라도 건져보려는 다급한 사정에 임시 조치로서 그렇게 한 것인데 마침 스탈린이 이를 들어준 것이다.
스탈린이 이 요청을 들어준 것은 그 대가로 유럽의 폴란드 점령과 아시아의 일본과 관계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 보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러한 미국의 야욕 때문에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 지금까지 민족적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우리에게 죽음의 고통을 안겨다 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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