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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승진의 실력자 최선희 외무상

김민준 기자 | 기사입력 2022/07/06 [15:20]

초고속 승진의 실력자 최선희 외무상

김민준 기자 | 입력 : 2022/07/06 [15:20]

지난 6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외무상으로 승진했다. 

 

최선희 외무상은 북한 최초의 여성 외무상이기도 하지만 그 전부터 북미 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그리고 고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주목받기도 했다. 

 

1964년 8월 10일 평양에서 태어난 최 외무상은 고아 출신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한 최영림 총리에게 입양되어 수양딸로 자랐다. 

 

최 총리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한 명씩을 입양해서 키웠다고 한다. 

 

수양아들인 최승호는 2014년 당중앙검사위원장을 역임했다. 

 

최 외무상은 1976년 중국 유학을 통해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고 1980년에 귀국했다가 오스트리아, 몰타 등으로 유학을 하기도 했다. 

 

1988년 정무원 외교부(지금의 외무성)에서 통역과 외국어 담당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최 외무상은 1995년 북미 경수로 협상에 통역으로 처음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2003~2008년 진행된 6자 회담 당시 북한 측 수석대표의 통역으로 활약했는데 영어를 모국어처럼 수준급으로 구사했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한국 측 관계자는 최 외무상의 통역 실력에 관해 “충실하게, 말을 놓치지 않고 하는 편”이라고 하였다. 

 

미국 측 통역이었던 김동현 통역관은 “거기는 강경파입니다. 당 지도부에 대한 충성심이, 남자와 여자가 거의 차이 없습니다. 여성으로서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 적 없습니다. 안색도 매우 진지하고, 화낸 얼굴을 하기도 하고”라고 기억했다. 

 

이렇게 통역만 20년 넘게 하다 외무성 북아메리카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2010년 부국장이 되었으며 그해 7월 6자 회담 북한 측 차석대표로 등장했다. 

 

그 뒤 2016년 국장으로 승진했고 미국연구소 소장을 겸임했으며 2018년 외무성 부상, 2019년 외무성 제1부상에 오른 뒤 이번에 외무상이 됐으니 근 5여 년 사이에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이다. 

 

금강일보는 2019년 3월 15일 자 보도 「최선희, 최영림의 수양딸 ‘어떤 인물인가?’」에서 최 외무상이 핵 문제는 물론 생화학무기, 미사일, 인권 등 대미 외교 전반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는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 2019년 4월 12일 개편된 국무위원회 위원 기념사진. 앞줄 맨 왼쪽이 최 외무상. 

 

최 외무상은 2018~2019년 북미 협상의 대미 창구로 활약했다. 

 

특히 주요 계기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입장을 설명해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을 ‘아둔한 얼뜨기’라고 불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세기 넘게 전쟁상태를 이어가며 대립하던 북한과 미국 두 나라의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은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북핵 폐기’를 요구하는 미국에 맞서 실무회담 불참으로 응답했고 이에 5월 23일 펜스 부통령이 “협상을 하지 않는다면 ‘리비아 모델’처럼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북한을 자극했다. 

 

‘리비아 모델’이란 표면상으로는 리비아가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제 보상을 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리비아의 핵을 없애 무장을 해제시킨 후 미국이 반군을 통해 전쟁을 일으켜 리비아 정권을 무너뜨린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에 최 외무상(당시 외무성 부상)은 다음날 개인 명의 담화를 통해 펜스 부통령을 강하게 비판한 후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 않으며 미국이 우리와 마주 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 있다”라고 폭탄선언을 하였다. 

 

담화 발표 후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발표해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세간에서는 최 외무상이 무리한 담화로 정상회담을 취소시킨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북미정상회담은 성사됐고 최 외무상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수행원으로 등장해 건재함을 드러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때는 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자 새벽에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에서 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대화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 앞으로 이런 기회가 다시 미국 측에 차려지겠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장담하기 힘듭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이른바 ‘하노이 제안’은 끝났고 미국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 것이라는 뜻이다. 

 

그해 6월 29일 한국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제안하자 최 외무상이 5시간 만에 담화를 발표해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반응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다음날 판문점에서 세 번째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국내나 미국에서는 보통 최 외무상을 대미 강경파로 분류한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특성상 대미 노선은 오직 노동당의 노선만 있을 뿐 개별 간부 사이에 강경파나 온건파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최 외무상에 관해서는 강경파냐 온건파냐 보다는 30년 가까이 현장에서 미국을 상대한 대미 외교 전문가라는 점이 더 중요할 듯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력이 단절되곤 하는 외교 인사 체계를 가진 한국이나 미국 입장에서 상대하기 무척 힘든 인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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