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9일 북한 노동신문은 기사 「당의 품에서 우리 청년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다」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집단 속에서 새 삶을 살게 된 청년 9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서도 지난 9월 30일 「“평생 주먹 자랑만 했었소”…김정은 격려로 환골탈태한 ‘범법자’ 청년들」이라는 제목으로 내용 일부를 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기사는 각 청년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지 않아 궁금함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또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청년절 경축행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2021년 8월 말 평양에서 청년절 30주년을 맞아 경축행사가 열렸다. 곳곳에서 모인 청년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사정이 어려운 ‘험지’를 가겠다고 나선 청년 9명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로 특별히 따로 불렀다. 또 청년 9명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질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다.
언뜻 청년 9명이 뭔가 ‘엄청난 성과’를 냈으리라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그렇기는커녕 한때 이 청년들은 온갖 사고와 소동을 일으켜 따가운 눈총을 받던 ‘불량 청년들’이었다. 오죽하면 가족·친지들도 두손 두발 다 들고 이 청년들을 거의 포기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랬던 청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험지로 가겠다고 스스로 ‘탄원진출’해 나선 것이다.
탄원진출이란 사정이 어려운 지역에 가겠다고 지원, 그곳에서 노동자·농민으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청년들로서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지역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다는 쉽지 않은 결심을 한 셈이다.
이런 사연을 보고받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청년들을 직접 맞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줬다는 점이 주목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해당 당 조직들에서는 어렵고 힘든 부문에 탄원진출한 청년들이 힘들어할 때에는 지팡이가 되어주고 발걸음이 더뎌질 때에는 기꺼이 떠밀어주고 손잡아 이끌어주어야 합니다”라며 “그렇게 하여 오늘과 같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탄생한 우리 시대의 자랑인 이런 청년들이 먼 훗날에 가서 자기의 한 생을 총화(평가)할 때 인생의 졸업증을 받을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사진을 찍은 청년 9명의 이름과 현재 소속 단위다.
전천탄광 리수복청년돌격대 김광석, 개천지구탄광연합기업소 조양탄광 최충성, 무산광산련합기업소 노천분광산 오충현, 개천철도국 개천철길대 청년기계화기동1중대 허강일, 흑령탄광 차광수청년돌격대 리주혁, 라진상하수도사업소 무창농축산물생산분사업소 김광명, 강원도청년돌격대 김철룡, 임업관리국 대관임산사업소 최재천, 룡등탄광 김광철청년돌격대 리정혁.
2022년 10월 기준, 청년 9명이 각 험지에 자리하고 난 뒤로 1년이 넘게 지났다. 1년여 동안 청년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번 연재에서는 노동신문을 바탕으로 사연을 추려 순서대로 소개한다.
③믿음과 노력으로 ‘801호 굴착기’를 몰게 된 청년
세 번째 순서는 오충현 무산광산연합기업소 노천분광산 노동자의 이야기다.
함경북도 무산군 일대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들이 늘어선 고원 지대다. 또 북쪽으로 두만강이 맞닿은 중국과의 국경이기도 하다. 이곳에 북한에서 철광이 가장 많이 나오는 무산광산이 있다. 무산광산에서도 오충현 노동자의 일터인 무산광산연합소는 북한 전역 제철소에 철광을 공급하는 핵심 시설이기도 하다.
현재 오충현 노동자는 무산광산연합기업소에서도 노천분광산에 소속된 노동자다. 노천광산이란 철광을 품은 광맥이 바깥으로 드러난 철광산 그 자체다. 그런데 오충현 노동자의 일터인 노천‘분(分)광산’은 본광산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말하자면 ‘새끼 광산’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오가는 길이 닦이고 정돈된 본광산, 그 주변 광산과 비교하자면 분광산은 개발이 한참 더디고 그만큼 노동 조건도 혹독하다.
바로 이런 일터로 오충현 노동자가 지원해 간 것이다.
지금부터는 오충현 노동자가 무산광산에서 보낸 지난 1년을 소개한다. 노동신문은 “지난 1년간 무엇을 배웠는가”라는 물음에 오충현 노동자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전했다.
처음부터 오충현 노동자가 노천분광산에 오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일터의 초소장이 다른 채굴장으로 옮겨가자고 했을 때만 해도 오충현 노동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기껏 고생해서 잘 꾸려놓은 기존 채굴장을 두고 굳이 채굴량이 떨어지는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충현 노동자의 반응에 초소장은 채굴 조건이 나쁘다고 많은 광석을 내버려 두면 쓸모가 없게 된다, 고생할 생각부터 하면 ‘무산 광부’라고 할 수 없다며 오충현 노동자를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오충현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새롭게 옮겨간 일터에서 힘든 조건을 뚫어내고 본래 계획한 월 생산계획을 뛰어넘는 철광을 채굴해 온 광산을 놀라게 했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그런데 이후 오충현 노동자는 조건과 환경이 더욱 어려운 노천분광산으로 지원했다.
이를 두고 노동신문은 “오충현 동무는 청년절 경축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 광산의 더 어려운 초소로 자진하였다”라며 “광산적으로도 손꼽히는 공훈광부인 리종학 초소장의 교대 운전공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그(오충현 노동자)는 온밤 잠들지 못했다”라고 일화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사람들 앞에 머리를 들고 살아보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던 그(오충현 노동자)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광의 자리에 세워주신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김정은 국무위원장의)의 믿음이 너무도 크고 고마워서 그(오충현 노동자)는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오충현 노동자에게는 큰 시련도 있었다.
굴착기를 모는 지식과 이론을 공부하는 것만도 무척 어려운데, 실제 채굴에서 굴착기를 실수 없이 몰아 채굴을 하려니 오충현 노동자의 고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오충현 노동자가 몰게 된 801호 굴착기는 크기가 거의 5층 아파트만 했고 채굴과 관련한 온갖 설비가 한데 모인 작은 공장과도 같았다. 굴착기를 어떻게 몰아야 좋을지 고심하느라 오충현 노동자가 밥맛을 잃었을 정도였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오충현 노동자는 새로운 일터에서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는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낮에는 일터에서 굴착기가 움직이는 방법과 원리를 배우고, 저녁에는 굴착기를 직접 몰며 채굴하면서 굴착기 작동법을 열심히 익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충현 노동자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굴착기를 마음먹은 대로 다루는 실력을 얻었다.
노동신문은 “그(오충현 노동자)는 포기하지 않았다”라며 “기술혁명 수행에서 선구자가 되자면 높은 지식을 소유하여야 하는 것만큼 동무들은 누구보다 학습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신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씀을 되새겨보며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였다”라고 전했다.
또 “마침내 그(오충현 노동자)는 짧은 기간에 마음먹은 대로 굴착기를 다루게 되었다”라면서 “처음엔 굴착기를 두려워하던 그가 이제는 기술혁신을 위한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라고 오충현 노동자를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오충현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1년간 저는 당과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 우리 무산 광부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배웠습니다. 그 어떤 광풍이 불고 그 어떤 역경에 처한다 해도 설사 절해고도에 홀로 남는다 해도 우리 원수님(김정은 국무위원장)만을 따르고 받들 이 마음은 변심 없을 것입니다.”
노동신문은 “자기의 본태와 핏줄을 똑바로 알고 애국의 대,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가는 이런 청년들이 앞으로 새 기준, 새 기록도 세우고 청년영웅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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