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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지금] 남오세티야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

이인선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2/10/28 [17:05]

[러시아는 지금] 남오세티야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

이인선 객원기자 | 입력 : 2022/10/28 [17:05]

이번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을 보며 많은 이들이 과거의 남오세티야 전쟁(이른바 ‘조지아 전쟁’)을 떠올렸다.

 

특히 특별 군사작전 초기 이라클리 오크리아슈빌리 조지아 전 국방부 장관이 우크라이나 편에서 싸우면서 남오세티야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을 비교하는 보도들이 연일 이어졌다.

 

이번 글에서는 남오세티야 전쟁을 살펴보며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과 비교해본다.

  

남오세티야와 조지아

 

조지아는 커피가 떠오르는 미국 조지아주가 아니라 ‘그루지야’라는 나라다. 조지아에선 ‘사카르트벨로(카르트벨인의 땅)’라 부르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러시아식 표기인 ‘그루지야(Грузия)’와 비슷한 명칭을 써왔다. 그러다 조지아 정부가 2005년부터 영어식 표기인 ‘조지아(Georgia)’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친서방국가들에서는 ‘조지아’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반면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은 그루지야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초대 서기장의 고향인 조지아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소련 초기 구성국인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1936년부터 소련 해체 전까지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존재했던 나라다. 당시 남오세티야는 그루지야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치주였다.

 

소련 해체 전인 1989년 11월 23일, 소련 반체제인사였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남오세티야 지역의 중심지인 츠힌발리에서 반소련, 국수주의적 성격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츠힌발리 지역에서 살던 남오세티야인들은 시위에 협조하지 않자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했고 격렬한 충돌로 번져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때부터 조지아 국수주의 세력과 남오세티야인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감사후르디아가 1990년 11월 14일 최고 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후 남오세티야인들이 독립을 외치며 자치 의회를 결성하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이인선 객원기자

 

1991년 1월 5일 새벽 무장한 6,000여 명의 조지아군이 츠힌발리를 쳐들어와 주민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남오세티야 사람들은 크게 분노하며 잔악무도한 조지아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1월 말 러시아의 중재로 정전협정을 맺고서야 조지아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조지아 정부는 남오세티야 지역의 경제봉쇄는 풀지 않았고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간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조지아는 츠힌발리로 가는 전선을 차단하며 봉쇄 작전을 벌였고 남오세티야는 조지아인 마을들을 봉쇄했다.

 

조지아 정부는 1991년 4월 9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5월 26일 83% 투표율과 86.5% 득표율로 감사후르디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91년 12월 25일 소련 해체와 함께 ‘조지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은 소련에 잔류하길 원했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 세력을 폭도와 테러분자로 간주해 이들을 학살하는 등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는 국제적 비난을 불러왔고 감사후르디아 반대 세력까지 출현하면서 조지아 내부 혼란이 심해졌다.

 

1992년 1월 19일 남오세티야에선 독립과 러시아 연방 가입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했고 투표자의 98%가 찬성했고, 3월엔 쿠데타로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이 추방되었다. 이후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도피했고 쿠데타 세력의 신망을 얻고 있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이 조지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자 1992년 3월 조지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러시아군이 개입하면서 조지아와 러시아 간 충돌로 확대되었다.

 

끝내 1992년 6월 24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셰바르드나제 정부는 조지아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조지아-러시아 합동 경찰력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남오세티야는 조지아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과 남오세티야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조지아, 러시아, 남오세티야가 포함된 공동 조정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조지아군, 러시아군, 남오세티아군의 군인들로 구성된 공동평화유지군이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조지아 정부는 경제발전을 명목으로 서방과 급속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조지아가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원유 및 천연가스의 주요 수송로이다 보니 이러한 조지아와의 만남은 미국과 유럽연합에 좋은 기회였다.

 

2003년 이른바 ‘장미혁명’이란 반정부시위로 셰바르드나제 대통령(1995~2000, 2000~2003)이 퇴진한 후 장미혁명의 주역이었던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정권을 잡았다. 서방 언론과 지도자들은 ‘장미혁명’을 구소련 국가 가운데 최초의 무혈 민주혁명으로, 사카슈빌리를 민주투사라고 치켜세웠다. 

 

사카슈빌리는 소련 해체 후 미 국무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컬럼비아대 법대와 조지워싱턴대 법대에서 각각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 법률회사 변호사로 일했던 친서방·반러 성향의 국수주의자다. 그는 1995년 조지아로 귀국한 후 2004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조지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및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는 등 조지아를 서방의 울타리에 넣고자 했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미국 같은 우방 없이는 조지아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라고 자주 말하며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2,300여 명을 이라크전에 파병하여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파병한 나라가 됐다. 

 

미 국방부는 ‘테러와의 전쟁’ 지원을 명분으로 2002년 4월 말 조지아에 대한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20개월 동안 모두 6,4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조지아군 훈련 및 장비 제공 프로그램’(GTEP)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미국은 약 130명 이상의 미군 군사고문단을 조지아에 상주시켰고 조지 W. 부시 대통령 부부가 미국 정상 최초로 2005년 9월 조지아 수도인 트빌리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 부시 미국 대통령(좌)과 사카슈빌리 조지아 대통령(우)이 2005년 9월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만났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는 2006년 조지아에 ‘공고한 대화 상대’ 지위를 부여했고 2008년 4월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조지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러시아와 나토 간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나토는 영향력을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러시아와 약속한 것과는 달리 동진(東進)해왔고 2008년 4월 4일 루마니아에서 발표한 부쿠레슈티 정상선언문 23조에 “조지아,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나토 가입 염원을 환영하며”라고 명시했다.

 

부시 대통령은 조지아에 미군 기지까지 건설할 구상을 가지고 이 회의에서 두 나라의 나토 가입을 촉진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하자고 고집했다. 러시아 코앞에 미국 미사일이 배치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과 서방의 조지아 지원과 나토의 동진을 두고 여러 차례 비판과 경고를 해왔다. 푸틴 대통령은 2008년 2월 “조지아의 나토 가입 움직임은 러시아에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6월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나토를 방문하고 7월에는 나토 함대가 흑해 내 조지아 영해로 들어와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하면서 러시아의 고심은 깊어져 갔다.

 

한편, 남오세티야 정부는 이 시기 조지아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오세티야는 2006년 11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해 99% 찬성을 얻어냈고 2008년 3월 5일 유엔 사무총장, 러시아 대통령과 상·하원, 독립국가연합(구소련 국가 연합) 소속 국가 등 국제사회에 독립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남오세티야 정부는 서한에서 “우리 주민들은 모두 러시아 국적도 갖고 있다”라며 “러시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상황에서 조지아와 결코 한 국가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들은 당시 미국과 서방이 세르비아 내 코소보 지역의 독립을 인정한 것을 두고 “코소보만이 유일한 독립 지역이 아니다”라며 “남오세티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국제법에 따라 (남오세티야는)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지아 정부와 남오세티야 정부 간 충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잦아졌고 2008년 8월에도 1일부터 소규모 교전을 하다가 7일 밤 휴전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조지아군이 남오세티야 수도 츠힌발리를 공격해 평화유지군으로 있던 러시아군 18명이 사망하고 남오세티야 주민을 포함해 35명이 다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푸틴 당시 러시아 총리가 2008년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통보하는 장면도 이때 나온 것이다.

 

▲ 부시 대통령에게 조지아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통보하는 푸틴 총리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소재 평화유지군 및 러시아인의 보호(남오세티야인의 80%가 러시아 시민권자)를 위해 제58군 예하 제135독립차량화소총병연대를 선봉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전황은 조지아와 서방에 당혹감만 안겨줬다. 서방의 지원이 있을 때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는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군이 파죽지세로 5일 만에 조지아군을 남오세티야 지역 경계선 밖으로 몰아내고 조지아 영토 일부(포티, 고리, 세나키, 주그디다)를 점령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전황

 

이렇게 가다간 며칠 내에 러시아가 조지아 영토 전체를 점령할 것은 분명했다. 이에 서방과 조지아 정부는 급하게 러시아 측에 휴전을 요청했고 유럽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중재로 2008년 8월 12일 조지아와 러시아 간 종전협정안이 체결되었다.

 

전쟁 종료 후 조지아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독립국가연합에서 탈퇴했고 남오세티야와 러시아 편에서 참전했던 압하지야 공화국은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현재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은 유엔 회원국 중 러시아,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나우루, 시리아만 인정하고 있다.

 

미국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부추겼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쏟아져나왔다.

 

주목해볼 점은 대다수 분석에서, 서방에서 나온 분석조차 조지아군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봤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 조지아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이라크 주둔 조지아군 전원을 8월 10일과 11일 단 이틀 만에 미군 수송기를 이용해 조지아로 돌려보내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의 안보·정보업체 ‘스트랫포(Stratfor)’는 8월 12일 발표한 자료에서 “(군사고문단까지 파견한) 미국이 조지아군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남오세티야 국경 주변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해두고 있다는 점을 미 정보당국이 몰랐을 리도 없다. 미 첩보위성과 무인정찰기들이 현지에서 각종 정보를 수집해왔을 것이다”라며 “러시아군이 조지아군의 남오세티야 침공을 계기로 역공을 펼치리란 점을 미 정보당국이 예견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조지아는 당연히 미국, 나토, 유럽연합이 있으니 러시아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고 설사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과 서방이 도와줄 거라 여기고 러시아를 도발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군대가 괴멸되었고 영토의 20%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조지아는 아직도 나토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전쟁 전 러시아가 조지아를 공격하면 군사 대응하겠다는 말만 하곤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하는 것에 그쳤다.

 

조지아군이 자초한 전쟁에 이렇다 할 말이 없던 미국과 서방국들은 조지아가 휴전을 제안하고 남오세티야 수도 츠힌발리에서 조지아군을 철수시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조지아 정부는 이런 미국과 서방을 여전히 믿으며 매년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한 데 이어 현재 우크라이나 편에서 싸우고 있다. 

 

▲ 합동군사훈련에서 조지아 국기(좌), 미국 국기(가운데), 우크라이나 국기(우)를 게양하고 있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이후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의원의 도움을 받아 2013년 우크라이나로 망명했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에는 미국이 지원한 이른바 ‘유로마이단 시위’가 일어났고 2014년 포로셴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친서방 정권이 들어섰다.

 

사카슈빌리는 이 과정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을 도와 우크라이나 국적을 부여받았고 201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자문을 맡으며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려는 돈바스 지역 공화국들(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탄압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사카슈빌리는 2015년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주지사로 임명됐고 2020년 5월 7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 의해 개혁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이 시작된 배경도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이 시작된 배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전황에선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미국과 서방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상황인 것은 똑같다.

 

반면, 러시아는 남오세티야를 조지아로부터 해방했듯이 이번 특별 군사작전에서 목표한 ‘탈나치화’, ‘돈바스 지역 독립’,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중단(우크라이나 중립국화)’도 달성한 상황임은 명확하다.

 

이러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외세를 추종하며 잘못 대처하다 국가를 재앙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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