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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갑오농민전쟁 5. 농민군의 위대한 승리, 승리, 승리!

구산하 | 기사입력 2023/04/15 [08:05]

[이 산하에] 갑오농민전쟁 5. 농민군의 위대한 승리, 승리, 승리!

구산하 | 입력 : 2023/04/15 [08:05]

▲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동상의 모습. 진군하는 농민군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농민군, 대승을 거두다!

 

황토현, 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최초의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첫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관군은 1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말 그대로 참패였다. 어제까지 논에서, 밭에서 낫과 괭이를 들고 땅을 일구던 농민들이 조선의 정식 군대를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 그 누가 감히 상상했겠는가. 압도적인 첫 승리를 거머쥔 농민군의 함성이 황토현, 아니 호남평야 전역을 울렸다.

 

무기도 열세하고 정식 군대로 훈련을 받아왔던 것도 아닌 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민심에서 찾을 수 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향해 파죽지세로 달려오자 전라감사 김문현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가는 자기 목이 날아갈 판이었는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잘만 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판이기도 했다.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김문현은 감영군을 투입해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김문현의 뜻과 달리 관군은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관군에 대한 민심이 싸늘했기 때문이다. 관군은 마치 출병의 목적이 약탈에 있는 것처럼 노략질을 일삼았다. 관군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은 ‘관군’의 ‘관’자만 들어도 이를 갈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백성들이 관군을 도울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농민군은 어땠을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농민군은 자체로 엄격한 규율을 세워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밭에 쓰러져 있는 보리라도 보면 행군길을 멈추고 그것을 모두 일으켜 세웠고, 노인이 짐을 지고 가면 달려가 그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백성들은 농민군을 사랑했고 그 마음을 농민군에 대한 지지와 원호로 표현했다. 전투에서 식량은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다. 농민군 쪽에는 전투 내내 여기저기서 음식을 담긴 바구니가 끊이질 않았다. 이에 반해 관군은 음식을 구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관군에 음식물 바구니를 넣어줄 백성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관군은 농민군이라는 적 말고도 굶주림이라는 적과 싸워야 했다.

 

다음 요인은 농민군의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관군은 농민군을 땅이나 파던 자들로 여기며 우습게 생각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관군이 쫓아오자 농민군은 대오를 둘로 갈라 흩어졌으며, 주력부대는 관군에 의도적으로 져주면서 도망쳤다. 전투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백산에서 벗어나 황토현 쪽으로 관군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농민군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지형이면서도 적을 기습하기에 좋은 곳에 진을 치고 때를 기다렸다. 관군은 나태하기 짝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농민군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그 나태함은 절정에 달했다. 술까지 마시며 마치 다 이긴 전투인 양 굴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모든 경계가 풀어진 새벽 4시, 농민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포탄을 쏘며 관군을 삼면으로 포위하여 달려들었다. 관군은 순식간에 뒤엉켜 쓰러졌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자 적아 구분은 더욱 쉬워졌다. 농민군은 도망가는 관군을 쫓아 응징했다. 

 

뜨거운 민심과 현명한 전략을 토대로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거둔 첫 승리는 의미가 크다. 이 전투의 소식은 조선 민중의 희망이 되었다. 먼저 나선 농민군을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이들에게 이 싸움이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땅을 갈아엎을 힘 있는 존재라는 긍지를 준 것이다. 황토현 전투를 기점으로 농민군의 대열은 더 크게 불어났다. 그 기세와 정신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무장과 백산에서의 결집이, 고부에서의 투쟁이, 황토현에서의 승리가 농민군을 단련, 성장시켰다. 전투 현장에서 벼려지는 농민군의 죽창은 이제 더 날카롭게 빛났다.

 

중앙군과의 일전, 결과는

 

황토현에서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한 날, 서울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중앙군인 경군을 이끌고 전주성에 도착했다. 이제 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은 중앙 정부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 나서야 할 경군의 사기는 높지 못했다. 황토현 전투 소식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농민군에 대한 두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았으며, 그중 일부는 도망쳐 농민군에 합세하기도 했다. 정작 홍계훈 본인도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쉽사리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장성 등의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차례로 장악해 들어갔다. 이는 전라도 일대를 손에 넣지 못할 경우, 전주성을 점령한다고 해도 반격의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해서 서울에서 내려온 홍계훈의 중앙군은 신식무기를 갖춘 군대로, 전라 감영의 관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이것은 그들의 기세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군은 확실한 승리를 위해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전라도 일대를 도는 과정에서 농민군은 자기 대오를 확장하고 전투력을 높일 수 있었으니,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탐색이 어느 정도 끝난 4월 23일, 드디어 장성 황룡촌에서 중앙군과 농민군이 첫 전투를 벌이게 된다. 홍계훈은 300여 명의 별동대를 조직해 농민군이 있는 장성으로 내보냈다. 이들은 식사 중이던 농민군을 향해 포를 쏘았다. 수십 명의 농민군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러나 농민군은 재빠르게 반격에 나섰다. 지형에 밝은 농민군은 곧바로 주변의 봉우리로 올라가 학 모양의 대열을 갖추고 경군을 에워쌌다. 그러고는 수십 개의 장태를 굴리며 경군을 향해 돌격했다. 장태는 닭을 키우기 위해 사용했던 닭구장태에서 착안한 농민들만의 무기였다. 

 

▲ 맨 위의 농민군 앞에 있는 것이 장태이다. [사진출처-장성군 홈페이지]

 

“밖으로 창과 칼이 삐죽하게 꼽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에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 돌을 쏘았지만 모두 대나무 통에 차단되어 버렸다. 적(농민군)은 대나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오하기문’, 우리역사넷 재인용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농민군의 모습이었다. 오로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반역의 죽창을 들고 일어난 농민군에게 물러설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의를 품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이들에 경군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황룡촌 전투 이후에 농민군은 총에도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부터 농민군 대장은 불사신이라는 소문까지, 농민군의 위력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전설처럼 떠돌았다. 당시 농민군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 짐작하게 한다.

 

결과는 농민군의 승리였다. 황토현 승리에 이어 황룡촌의 승리는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농민군이 조선의 중앙군, 정예부대와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대포와 기관포, 양총 등의 신식무기까지 획득한 것이다. 이는 일개 지역의 관군을 격파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농민군의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음은 물론이고 서울을 향한 농민의 진군길에는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왕은 농민군을 회유하고자 윤음을 보냈는데, 농민군은 이것을 들고 온 자들을 죽였다. 이제 그 어떤 회유도 농민군의 앞길을 막을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부정하고 부패한 왕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원하는 바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전주성을 점령하다

 

▲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백년]

 

농민군은 전주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이미 승리를 예견하는 신바람 나는 발걸음이었다. 처음 궐기하고 난 이후부터 농민군의 목표는 일관되게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 꿈같은 일이 실현되기 직전이었으니 그 환희를 다 어떻게 표현하랴. 

 

4월 27일, 전봉준과 1만 명의 농민군이 전주성 점령을 개시했다. 전주 시내 곳곳에는 이미 농민군 수천 명이 들어가 있었고, 전주성을 사방에서 에워싼 농민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점령! 전주성 안팎은 순식간에 농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쏜살같이 달아났고, 그 아래 주요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농민군에 맞서 싸울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농민군은 그 누구도 다치지도, 죽지도 않고 전주성을 장악했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전주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지역이었으며 조선을 먹여 살리는 호남평야의 상징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그 의미가 각별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의 문을 연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곳이기도 했다. 이런 전주가 농민으로 이뤄진 ‘반란군’에 점령당한 것이다! 조선 정부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전주성 점령으로 전라도 일대가 농민군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조선 역사상 있어 본 적이 없는, 농민군의 손으로 일군 위대한 승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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