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노동운동가로 참된 애국 투사의 삶을 불꽃처럼 산 김태완 동지
진보노동운동가로 참된 애국 투사의 삶을 불꽃처럼 산 김태완 동지가 지난 7월 16일 운명했다. 향년 54세.
김태완 동지는 20대에는 학생 운동가로, 30대에는 진보정당 활동가로, 40대에는 노동운동가로 헌신하였다.
김태완 동지는 운명하기 6일 전인 7월 10일 새벽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다. 김태완 동지의 아내가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생명이 위중했다.
김태완 동지는 새벽까지 그날 회의에 제출할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사업계획서를 보낸 뒤 쓰러졌다. 쓰러진 곳도 침대가 아닌 일하던 그 자리였다.
1990년 홍익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태완 동지는 학생운동에 헌신했다.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권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 대한 탄압은 엄청났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전국의 대부분 대학을 경찰이 침탈했고, 20대의 젊은 청춘들은 감옥에 끌려갔다.
김태완 동지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집행위원장을 하다가 그해 8월 홍익대학교를 침탈한 경찰이 김태완 동지를 연행해 구속했다.
감옥에서 나온 김태완 동지는 진보정당 운동에 뛰어들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마포구위원회 부위원장, 2008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수석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2012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후보로 마포구에 출마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을 강제해산한 뒤에 절치부심하던 김태완 동지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가 되었다.
김태완 동지는 택배노동자를 묶어내기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김태완 동지의 노력으로 택배노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김태완 동지는 2016년 ‘CJ대한통운 택배기사 권리찾기 전국모임 공동대표’, 2017년 1월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초대 위원장, 2020년 7월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21년 4월 전국택배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정치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김태완을 기억하며 다짐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은 김태완 동지가 세상을 떠나자 애도하며 동지의 뜻을 잇겠다고 다짐했다.
장진숙 진보당 공동대표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존경하는 선배, 사랑하는 동지, 혁명가 김태완 동지를 보내며」라는 제목의 글을 적었다.
장 공동대표는 “김태완 동지는 90년대 중엽 혼란스러운 운동의 한복판에서 변혁운동의 줏대, 신념과 원칙을 지킨 동지이다. 모진 탄압 속에서도 ‘생명이 귀중한 것만큼 귀중한 원칙을 지켜 싸우자’던 동지가 있어 오늘의 저도 있다”라면서 “김태완 동지는 진보정당 운동을 하면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과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이르기까지···진보집권에 대한 책임감이 남달랐기에 가족도, 자신도 돌볼 틈 없이 달렸다”라고 김태완 동지를 떠올렸다.
이어 장 공동대표는 “김태완 동지는 착했고, 고지식했고, 내성적이었다. 그래서, 변할 줄 몰랐고, 우는소리 할 줄 몰랐다”라고 적었다.
장창준 한신대학교 글로벌피스연구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형은 90학번, 나는 92학번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비록 형은 당선, 나는 낙선했지만 총학생회 후보로 출마했다. 연도는 달라, 한 번도 같이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서부총련, 서총련 간부를 했다. 똑같이 군도바리(군 기피자)를 했고 똑같이 감옥살이했다. 30대엔 진보정당에 가입했고 진보 집권을 위한 길을 함께 걸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같이 기뻐했고,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에 같이 분노했다”라고 적었다.
이어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나와 형의 활동 공간은 확연히 구분되었다. 형은 택배 노동자가 되어 노조를 만들기 위해 돌아다녔다. 나는 박사 나부랭이가 되어 강연, 교육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같았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통일되는 세상,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나와 형의 꿈이었다”라면서 “우리가 꾸었던 꿈, 형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 내가 형 몫까지 할게”라고 적었다.
이연희 겨레하나 사무총장은 추도사를 통해 “깃발을 세우고 동지를 모으고, 그 길을 지키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 김태완 동지였다”라고 말했다.
김태완 동지는 학생운동이 정권의 모진 탄압과 여론몰이로 힘들 때, 앞장서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의 깃발을 지켰고,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온갖 탄압과 상처받은 당원들을 보듬으며 깃발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어 이 총장은 “30년, 우여곡절 속에서도 원칙을 지켜 싸운 동지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라며 “동지가 가르쳐준 대로 원칙을 지켜 싸우고, 노동해방, 진보집권, 자주통일의 꿈, 멈추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정인 홍익대학교 민주동문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1년 후배이지만 무언가 깨달음을 주는 만만치 않은 후배였다”라고 김태완 동지를 떠올렸다.
이어 “태완아, 너는 불씨다. 겁 없는 불씨다.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큰일을 기꺼이 저지르고야 마는 그런 불씨다. 절대로 꺼지지 않고, 언제든 다시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 줄 그런 불씨”라고 말했다.
김재하 전국민중행동 공동대표는 “김태완 동지의 애통한 짧은 삶은 노동자, 민중과 자주와 통일의 조국을 위한 삶”이라며 “김태완 동지는 천상 혁명가이다. 그가 남겨주고 채워준 것이 너무나 많아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의 가슴은 오랜 기간 헛헛할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김장호 현장언론 민플러스 기자는 “과로사를 없애려다 과로로 쓰러진 동지, 언제나 새 길을 개척한 사람, 택배노조의 새 길을 열어간 사람”이라며 김태완 동지를 기억했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가수 백자 씨는 “과로사가 없는 세상을 위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자주와 통일의 세상을 위해”라고 결심을 다졌다.
김태완 동지의 삶과 전국택배노동조합은 떼려야 뗄 수 없다.
택배노동자인 김명환 씨는 지난 7월 17일 현장언론 민플러스에 기고한 글에서 김태완 동지가 “세 명만 모이면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고 뜻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며 택배노동자들을 묶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고 적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전국택배노동자권리찾기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인터넷에서 소통하는 공간이었으나 결국 전국택배노동조합 결성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명환 씨는 “공짜 노동 분류작업 거부 투쟁, 스물일곱 명의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를 끝장내고 택배사들을 끌어내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도 언제나 그(김태완 동지)는 가장 앞장에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진경호 전국택배노동조합 위원장은 추도사에서 “해고노동자 김태완 동지에게 복직 투쟁하자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태완이는 본인의 복직 투쟁이 노조에 부담될까 봐 다음에 하자고 했다”라면서 “조직을 위해 헌신했던 태완 동지를 아직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태완 동지가 우리에게 남겨준 길을 전체 조합원들과 함께 따라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규혁 서비스연맹 위원장도 추도사에서 “CJ대한통운, 우체국, 한진, 롯데, 로젠, 쿠팡 택배노동자 조직화에 김태완 동지의 헌신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 마련,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 제정 등 그 투쟁 하나하나에 김태완 동지의 땀과 정성이 묻어있다”라고 말했다.
"뭉치면 주인 되고 흩어지면 노예 된다!"
남희정 전국택배노동조합 서울지부장과 서면 대담으로 김태완 동지의 삶을 돌아봤다.
기자: 김태완 동지와의 인연을 말해달라.
남희정: 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총련이 정권의 공안몰이에 한창 어려웠던 시기에 학생운동이 원칙과 정도의 길을 걷는 데 큰 힘이 되었던 선배였다. 2000년대에 김태완 동지가 민주노동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사업도 함께 하며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많은 의견도 나누게 되었다. 김태완 동지는 진보정당 운동이 잘되어야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된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박근혜 정권에 의해 통합진보당이 강제 해산당하며 진보정당 운동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김태완 동지는 노동운동의 현장에서부터 진보정당 운동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며 택배노동 현장으로 투신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함께 택배노조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그때로부터 함께 택배노조를 건설하면서 동고동락한 지 벌써 9년째이다.
기자: 김태완 동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남희정: 김태완 동지는 책임감이 강하고 정말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택배노조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노조를 처음 창립했을 때만 해도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하던 일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당시 현장을 다니면서 세세한 문제들까지 조합원들과 함께 대책을 세우면서 밤을 지새우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은 택배노조가 끈질기게 투쟁해서 생활물류서비스법이 제정되어서 쉽게 해고할 수는 없지만 그때만 해도 쉽게 해고되던 때였다. 김태완 동지는 자신을 돌볼 줄을 몰랐다. 학생운동부터 진보정당을 거쳐 택배노조를 함께 하면서 그의 건강을 동지적으로 챙겨주고 지켜주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된다.
기자: 택배노조와 김태완 수석부위원장은 뗄 수 없다고 하던데, 설명해달라.
남희정: 택배노조가 이루어 낸 성과들을 돌아보면 김태완 동지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노조를 창립하고 처음 부딪혔던 벽은 특수고용자인 택배노동자는 노조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김태완 동지가 20일 정도 단식농성까지 했다. 처음으로 노동조합 설립 필증을 받게 되었을 때는 정말 모든 조합원이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현장에 조합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우리도 이제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할 수 있다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기자: 2021년 택배노동자의 파업이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그때 김태완 동지의 역할은?
남희정: 코로나19가 확산되자 택배 물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그러다 보니 택배기사의 배달물량이 폭주하게 되고 과로사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2021년 한 해에만 20여 명의 택배기사가 과로사로 돌아가셨으니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태완 동지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택배기사 과로사방지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1년이 넘는 긴 투쟁을 통해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일구어냈다.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고 나서 택배 현장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하루에 적게는 3시간부터 많게는 7시간 이상을 분류작업이라는 공짜 노동에 시달린 것이 과로사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사회적 합의를 통해 분류작업을 원청인 택배회사가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당시 코로나19로 정부에서는 집회마저 금지하던 때였는데 전 조합원이 모여서 투쟁하던 때를 돌아보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기자: 택배노조에서 김태완 수석부위원장은 유일한 해고노동자라고 하던데, 왜 그런가?
남희정: 박근혜 탄핵 촛불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제 노동조합을 막 건설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당시 CJ대한통운은 노동조합 설립을 막아보려고 곳곳에서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그때 김태완 동지는 투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하자고 하면서 현장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자 CJ대한통운은 당시 김태완 동지가 소속되어 있던 대리점을 폐점하는 방식으로 김태완 동지를 해고했다. 당시 4명의 조합원이 함께 해고되었다. 노동조합 초기에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어떻게든 해고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해고와 관련된 투쟁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어려웠지만 다 복직하고 승리했는데 정작 김태완 동지는 자신의 해고 문제는 천천히 하자며 뒤로 미루었다. 자신의 해고 문제보다는 노동조합을 꾸리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기자: 김태완 동지가 꿈꾸던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남희정: 김태완 동지는 택배노동자들의 손을 꼭 잡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진보정당이 집권해야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봤다. 그런데 사회적 인식은 노동조합이 정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는 게 사실이다. 더욱이 진보정당이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으니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택배노동자들은 자기 운명을 개척하려면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법천지나 다름없던 현장에서 생활물류서비스법을 제정하기 위해 투쟁하면 보수정당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왜곡하기 일쑤였다. 그런 투쟁을 하면서 김태완 동지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진보집권을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자: 김태완 동지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남희정: “뭉치면 주인 되고 흩어지면 노예 된다!” 이 구호라고 생각한다. 택배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모이기만 하면 항상 마지막에 이 구호를 외친다. 김태완 동지는 택배노조를 건설한 것은 “레일 끝에 부속품처럼 살던 택배노동자들이 현장과 세상의 주인으로 살겠다고 나선 것”이라고 항상 이야기했다. 앞으로도 택배노동자들은 김태완 동지의 정신이 담겨 있는 이 구호를 쉬지 않고 외치며 투쟁해 나갈 것이다.
자주, 민주, 통일과 노동해방, 진보집권을 위해 한 생을 바친 김태완 동지는 비록 세상을 떠났으나, 많은 사람의 가슴에 진보노동운동가, 참된 애국 투사 김태완은 영원할 것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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