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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5) 중국 인민해방전쟁과 마오의 ‘인민민주통일전선’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11/28 [20:47]

[사람을 찾아서] (5) 중국 인민해방전쟁과 마오의 ‘인민민주통일전선’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11/28 [20:47]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중국 인민해방전쟁)에서 승리했다.

 

내전이 시작되었을 무렵 양측의 전력은 거의 국민당이 4배 정도 우위였다. 또한, 미국의 국민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무기와 장비 그리고 보급 면에서 절대적으로 공산당은 열세였다.

 

▲ 1945년 11월 국민당 군대 수송을 돕는 미 해군 수송선 USS 하노버.  © Copeland.James.H


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은 16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 통치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전 초기 전세는 국민당에 유리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승리는 내전 시작 후 1년 정도가 전부였다.

 

국민당군은 일본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점(도시)과 선(철도)만을 차지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농촌 지역의 지지를 바탕으로 점과 선을 포위했다.

 

1948년 인민해방군은 방어에서 대치로, 그리고 1948년에 들어서는 반격으로 전환했다. 공산당은 그해 9월부터 12월에 걸쳐 랴오선 전투, 화이하이 전투, 핑진(베이징과 톈진) 전투로 불리는 국민당과의 3차례의 대전투에서도 승리했다.

 

▲ 화이하이 전투 장면.


드디어 중국공산당은 1949년 1월 베이징에 무혈 입성했고, 장제스는 12월 군대 50만과 여전히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여러 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은 톈안먼의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 1949년 중화민국 수도인 난징의 총통부를 점령하고 기를 게양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마오쩌둥의 ‘인민민주통일전선’ 혁명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건국에는 동북 지방에서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조선공산당이 국공내전에 직접 참가해 동북 해방에 큰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북한이 원조와 후방을 담당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전쟁에 지춘란도 미국의 압도적인 비행기, 탱크, 대포로 사상자가 많이 생기면서 전상자 치료 요원으로 참전했다.

 

 

마오쩌둥의 인민민주통일전선

 

마오쩌둥은 항일전에 사용했던 ‘지구전’과 ‘유격전’을 전개하고, 국민당군을 농촌과 산악의 오지로 유인해 격퇴하고, 해방구를 넓혀갔다.

 

마오의 기본전략은 ‘지구전’과 ‘유격전’의 기반이 되는 인민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인민전쟁론”이다. 그리고 여기에 광범위한 중간층, 때로는 적의 일부도 끌어드리는 “인민민주통일전선론”을 구사했다. 또한, 당의 절대적인 지도를 받는 군과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근거지론”도 병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전을 전개하는 동안 농촌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는 ‘토지제도 개혁운동’을 함으로써 많은 농민을 동맹군으로 끌어드렸다. 또한, 도시에서는 장제스 반동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폭로하였다.

 

특히 장제스가 일본을 대신해 침략을 기도하는 미 제국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국민당을 공격하면서, 기아에 허덕이는 빈민과 노동자 그리고 중간층을 흡수했다.

 

1946년 8월 마오는 미국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대담에서 “반동파는 보기에는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리 대단한 힘이 없다. 진정으로 강력한 힘은 반동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 장제스와 그의 지지자인 미국 반동파도 종이호랑이다. …중략… 중국의 전쟁을 놓고 봤을 때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좁쌀에 보총(步銃: 보병이 사용하는 총)일 따름이지만, 역사는 결국 이러한 작은 것이 장제스의 비행기와 탱크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반동파는 반동을 대표하고 우리는 진보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의 국내외 정세, 반동파의 본질, 중국혁명의 전망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공산주의자들과 인민을 이론적으로 무장시킴으로써, 제국주의 비호 아래 있는 국민당 반동파와 투쟁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크게 북돋아 주어 결국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국공내전에서 조선의용군 부대의 참전과 활약 

 

동북 지방의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인이 집결한 지역에 들어가 인민 무장 부대를 창설하고 일제와 만주국의 잔당, 국민당과 결탁하고 있던 정치 토비(土匪)를 소탕하며, 남만·북만·동만 근거지를 건설했다.

 

이종석 저서 『북한-중국관계(1945~2000)』(중심, 2001)에는 “조선의용군의 경우 1945년 11월 10일 심양 교외에서 무정의 주재로 조선의용군 전체 지휘원·전투원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을 제1, 3, 5지대로 나누어 편성하고 각각 남만·북만·동만 지역으로 나가 조선족 대중을 규합해 부대를 확장하기로 결정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이종석에 따르면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1945년 11월에 심양에서 설립되었는데 당시 병력은 1천 6백여 명이었다. …중략… 확군 작업을 거쳐 1946년 2월에는 5천 명의 병력을 지닌 조선족 독립부대로 성장했다. 그리고 1947년 말에는 8천 명, 1949년 봄에는 1만 2천 명의 대부대로 발전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초기 전투 성과로 주목할 만한 것은 1946년 2월에 치른 통화 ‘2.3폭동’ 진압이었다. …중략… 통화 폭동을 진압한 직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중공의 요구에 따라 이홍광(李紅光)지대로 부대 명칭을 바꾸었다. …중략… 1946년 12월 초에 다시 동북민주연군 독립4사로 개칭되었다. 부대 개칭과 함께 독립4사는 그해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임강 지역을 사수하는 전투를 치렀다. 이어서 1947년 말부터 1948년 3월 사이에는 사평(四平)해방전투에 참가했으며 1948년 가을부터는 국공내전의 분수령이 된 요심 전역에도 참가했다. 요심 전역에 참가한 독립4사는 1948년 11월 2일 다른 중공군 부대들과 함께 심양을 해방하고 입성했다. 심양 해방 직후인 1948년 11월, 독립4사는 중공 계열의 부대 명칭 변경에 따라 동북인민해방군 제166사로 재편되었다”라고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종석은 북만 지역으로 진출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 대해 “남만의 제1지대처럼 주변의 조선족 부대들을 흡수해 독립적인 대부대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했다. …중략… 실제로 제3지대의 병력은 1946년 하얼빈 수복 직후인 5월에 3천여 명을 고비로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사단으로 발전한 제1지대와는 달리 1946년 여름 동북민주연군 송강군구 제8단으로 재편되면서 단급 무장부대로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정리했다.

 

 

국공내전에서 동북항일연군 출신 부대의 참전과 활약 

 

마지막 동만 지역에 대해 이종석은 “동만에서의 조선족 무장부대 조직은 항일연군 출신인 강건(강신태)이 9월에 연변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다. 강건은 연변에 들어오자 동북항일연군을 개칭한 동북인민자위군 산하 연길지휘부를 구성하고 10월에 연변 각지에서 만들어진 중공 계열의 별동대, 보안대 등의 무장 조직을 하나로 묶어 7천여 명의 병력을 갖춘 경비1, 2, 3단을 조직했다. …중략…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변에 도착했을 때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항일연군 출신들이 조선족 중심의 무장 부대를 조직·확대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제1, 3지대와는 달리 항일투쟁의 경험을 지닌 대규모의 인원으로 만주 지역에서 가장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 지역으로 진출했으나, 독자적인 부대로 발전하지 못한 채 기존의 연변 지역 무장 체계에 편입되고 말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종석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1946년 1월 초에 강건이 지휘하는 연변 경비 1, 2단과 합병해 잠시 조선의용군 제15, 16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1946년 연변군분구가 길동(吉東)군분구로 바뀌면서 제15단은 관내에서 온 한족 병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길동경비2려의 1개 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제16단은 강건이 여장을 맡은 조선족 중심의 길동경비1려의 1단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길동경비1, 2려의 병력은 모두 2만 8백여 명이었으며 그 중 조선족이 1만 2천여 명이었다. 길동경비2려에 편입된 조선의용군 제15단은 뒤에 길림군구 독립3단을 거쳐 1948년 1월에는 동북군구 독립6사 16단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11월에는 독립6단, 7단과 합쳐 제4야전군 43군구 156사를 구성하면서 466단이 되었다. …중략… 길동경비1려에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16단의 경우 그 뒤에 동북군구 독립1사 1단으로 개편되었다가 1947년 8월에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30사 89단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이 부대는 요심 전역이 마무리될 즈음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 출신 일부가 소속되어 있는 독립1사(전 359려)와 독립3사와 합쳐 제4야전군 47군 141사를 구성하면서 422단이 되었다”라고 썼다.

 

 

지춘란 소속 부대, 길남군분구 제72단

 

지춘란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 지춘란은 4280.3.25. 만주 길림성에서 중공군 제72단 전사(위생원)로 입대 후 만주 중국 본토에서 국부군과 대전하면서 중공군 부상병을 치료하여 오던 중 4282.5월 양사(소위)로 승진 4282.9.4. 중국 공산당에 입당”까지가 중국 국공내전에서의 행적이다.

 

판결문의 중공군 제72단은 길남군분구 제72단이고, 이후 독립11사에 편성된다.

 

이종석 저서에 따르면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동만으로 진출하면서 경유 지역인 길림 지구에 박훈일 등 일부 간부를 남겨 놓았다. 이들은 1945년 11월 말 길림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곧 소련군의 퇴거 명령에 따라 부대를 화전현으로 옮겼으며, 여기서 길림성 보안총대 제7대대를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시켰다. …중략…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뒤에 길남군분구 제72단이 되며, 다시 1948년 4월에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전신으로 하는 제8단 및 목단강군구 14단과 함께 독립11사를 구성하게 된다”라고 쓰여 있다.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전 베이징(北京)대 교수, 김경일(중국명 진징이, 2020년 11월 별세)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논형, 2005)에서 “1948년 11월 2일 전 동북이 해방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 해방을 두고 ‘중국과 미국의 반동파가 동북 인민을 노예화하려 하고 동북을 이용하여 국제전쟁을 일으키려던 미몽을 깨뜨렸다’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동북 해방은 중국공산당의 전국 해방에 튼튼한 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 동북 해방에서 북한이 보내준 원조는 매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향후 양자관계의 튼튼한 토대가 되었고, 북한으로서는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이 해소됨으로써 내정에 주력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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