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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6) 중국 동북3성 조선인 장병들의 귀국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12/12 [23:56]

[사람을 찾아서] (6) 중국 동북3성 조선인 장병들의 귀국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12/12 [23:56]

중국의 국공내전(인민해방전쟁)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중국 동북3성 제4야전군 총사령관 린뱌오(林彪, 1907~1971) 산하 조선인 장병은 자연스럽게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한다.

 

그것은 중국 동북조선인의 역사적 특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와 입술 같은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관계 속에서 동북의 조선인은 항상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다.

 

항일전쟁 시기가 그랬고, 중국 국공내전 시기가 그러했다.

 

 

중국 제4야전군 소속 지춘란의 귀국

 

지춘란은 중국 국공내전 당시 길남군분구 제72단에서 이후 독립11사에 편성된다. 1949년 3월에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 후 같은 해 9월 4일 지춘란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지춘란 또한 마찬가지로 조선으로 귀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은 항미원조지원군으로 조선에 간 것으로 알고 있다. 6.25전쟁 시기 후방부대(중국에서는 빨치산을 후방부대라 한다고 들었다 - 황금수)에 배속되기 전까지 남쪽으로 부대와 함께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겨울에 의료요원으로 미군의 공중 공격을 피해 낮에는 산속에 숨고, 밤에는 소달구지를 이용해서 조선 국경을 넘어서 중국 야전 병원에 전상자를 맡기고 돌아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후방부대에 배속되었다”라고 증언하였다.

 

▲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방역활동을 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방역선전대.  © USAG- Humphreys - Korean War - 60th Anniversary Photo Archive


지춘란이 ‘항미원조지원군’으로 조선에 갔다는 부분은 확인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지춘란 판결문에 “4283.4.7 평양에서 북한 괴뢰군에 편입되어 괴뢰군 중앙병원에서 소성(소위)으로 배치된 후 4284.2.15경 강원도 횡성에서 대남유격대인 제3지대 간호장으로 편입되어”라고 되어있다. (4283은 단기 연호로 서기 1950년이다 - 편집자 주)

 

그리고 제3지대 남도부 빨치산 생존자 성일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정원석 장편소설 『북위 38도선(하)』(교학사, 2006)에 따르면 “갈산 고지에서 남도부 사령관의 수발을 든 지춘란은 중국 팔로군 간호 중위로 동북 지방 의용군 출신이었다. 일월산에서 사령관을 따라 남하했다”라고 쓰여있다. 여기에서는 지춘란을 ‘팔로군’이라 했다. 

 

중국 국공내전 당시 동북3성 조선인 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명칭 변경된다. 그리고 이후 북한으로 귀국한 장병들을 보통 팔로군이라 불렀다.

 

원래 팔로군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며, 1927년 난창(南昌) 봉기 때는 공농홍군으로 불렸다. 국공합작 결렬 이후에는 다시 홍군이라고 하다가 1947년에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다. 

 

항미원조지원군이란 항미원조(抗美援朝: 미제에 맞서 조선을 도움)와 보가위국(保家衛國: 가정과 국가를 지킴)의 기치로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이다. 

 

▲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는 항미원조지원군(인민지원군).

 

 

중국 동북3성 조선인 장병들의 귀국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문제 전문가 김경일의 저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논형, 2005)에서 “남과 북이 힘의 대결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조선족 부대의 귀결점은 결국 북한으로의 귀국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우선, 동북 조선족의 이중적 특성이다. 항일전쟁 시기에 중국의 반 침략전쟁과 조선의 독립이라는 두 가지 사명을 생각했던 조선민족은 항일전쟁 이후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이라는 두 가지의 사명을 떠안게 되었다. 이제 중국혁명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된 상황에서 이들은 조선혁명이라는 또 하나의 사명을 앞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혁명의 승리가 이들 조선족 귀국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중략… 둘째, 중국과 북한은 항일전쟁 시기의 역사적 관계를 기반으로 다른 한 의미의 운명공동체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949년 대륙에서 실패한 장개석이 남한의 이승만, 필리핀의 퀴리노 등과 ‘태평양 반공동맹’의 결성을 기도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미국의 사주 하에 진행되는 하나의 ‘음모’로 인식하게 되었고, 미국이 여기에 일본 반동파까지 가담시키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즉 미국의 맥아더, 일본의 요시다, 남한의 이승만, 대만의 장개석이 하나의 전선을 이루고 있다고 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세계의 주요 모순을 민주와 반민주의 모순, 즉 미 제국주의와 미국 국민 간의 모순, 미 제국주의자 및 그 주구와 식민지·반식민지의 여러 민족 간의 모순으로 보았다.(解放日報:延安, 1947.1.1.)

 

일제강점하 동북 지역 조선인은 주요 모순인 일제와 그 주구와의 싸움에서 중국 민족과 연대 연합하여 일제를 타도함으로써 중국의 독립에 공헌했다. 그리고 미 제국주의자 및 그 주구 장제스 국민당과 일전을 벌여 국가 통일을 쟁취하는 데도 그들은 이바지하였다.

 

이제 동북 지역 조선인에게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빼앗긴 조선의 독립과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새로운 적인 미 제국주의자 및 그 주구와의 대결과 조선혁명이란 사명이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과 소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두 초강대국을 축으로 나뉘어 냉전이 시작된다. 

 

냉전(Cold War)이란 말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기고한 칼럼 「당신과 원자탄」에서 사용됐다. 그는 핵전쟁의 위협 속에 선전포고도 없이 전시와 다름없는 긴장 속에 미국, 소련이 세계를 양분해 지배하고자 하나 어느 쪽도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태를 냉전이라 불렀다.

 

그리고 1946년 3월 영국의 전 총리 처칠은 미국 방문 중 이런 냉전 상황을 “발트해의 슈체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드리워졌다”라고 ‘철의 장막’으로도 표현했다.

 

1948년 6월 24일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양 진영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렬해졌다. 베를린은 소련의 관할지역이었지만, 수도라는 특성 때문에 4개 연합국으로 분할 점령됐다. 그중 미국, 영국, 프랑스가 서베를린을, 소련은 동베를린을 관할했다.

 

1948년 3월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지역을 경제적으로 통합하려 하자 소련이 반발하고 서베를린을 봉쇄한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빌미로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조약을 조인하고 군사동맹인 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를 창설한다.

 

비록 소련이 1949년 8월 29일에 1차 핵시험을 통해 미국과 핵 경쟁을 시작하지만, 1949년 집단안전보장기구인 나토 창설 등 사실 대등하지 않은 대결이었다.

 

‘냉전’, ‘동서 분쟁’이라는 말은 마치 양 진영이 동일한 조건에서 대결한 것으로 보이게 하지만 사실 소련은 미국보다 너무 열악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너무 나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역할도 제대로 못 하고, 미국은 전쟁 끝에 가서야 겨우 참전했다. 소련은 국토가 거의 폐허가 되었고, 인명 손실이 너무 컸다. 

 

이런 냉전 상황에서,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이었던 대규모 열전(Hot War)이 벌어진다.

 

 

중국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완충지대 한반도 

 

한반도는 ‘동방의 발칸’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은 모두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이었다. 

 

19세기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혁명 등으로 이미 쇠락의 길을 걷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먼저 중국을 침략하였다. 

 

중국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9일 중국은 난징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중일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아시아의 반소, 반공 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장제스 국민당에 군사원조와 지지를 했다. 

 

그러나 마침내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또한 중국은 과거 중일전쟁처럼 한반도가 일제 대신 미 제국 침략의 교두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한반도가 동아시아 지역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완충지대가 되어야, 중국은 오로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만 힘을 쏟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코 한반도의 전쟁을 중국은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이해가 일치하였다.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도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의해 상호협력을 다짐했다.

 

미국기자 스톤은 “일본은 조선을 대륙에서 내민 권총으로, 중국인은 한반도를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는 교두보로, 러시아인은 한반도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위협으로, 미국은 한반도를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고 억제전략을 실시하는 요충지로 간주하였다”라고 말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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