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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미군의 세균전 재귀열과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 그리고 지춘란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2/21 [18:11]

[사람을 찾아서] 미군의 세균전 재귀열과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 그리고 지춘란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2/21 [18:11]

지춘란은 1951년 2월 15일경 횡성에서 제3유격지대 사령관인 박종근 부대에 배속되어, 뒤에 일월산에서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를 따라 남하할 때까지 의료 요원으로 박종근과 함께 활동한다.

 

박종근은 이미 1951년 1월 20일, 김일성 총사령관의 명령서를 접수하고 곧바로 제3유격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물론 박종근은 경북도당 위원장 역할도 겸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연합사령부(조중연합사)의 작전에 따라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활동이 우선이었다.

 

박종근은 속히 적군의 등 뒤로 움직여 후방 교란 작전을 해야 했다.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 대오 정비 후 영천군 보현산으로 진출하다

 

박종근은 제3지대를 횡성군 둔내면에서 편성한 다음, 1951년 2월 14일 그곳을 출발하여 영천군 보현산을 목표로 행군했다는 빨치산 기록이 있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에서 제2군단의 성의 있는 원조를 받으면서 자기의 대오를 정비하여 재편성한 다음, 1951년 2월 14일 횡성군 둔내면 서문골을 출발하여 1951년 4월 20일까지 자기의 전투 지역인 보현산 계선을 목표로 진출한 2개월간의 제3유격지대의 사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중략)” (제3유격지대 지대장 박종근, 「제3유격지대 2개월간의 사업보고서(1951년 2월 14일부터 1951년 4월 20일까지)」, 1951년 5월 3일, 22면; NARA RG 242; 국립중앙도서관 해외한국관련기록물 수록)

 

이때는 중국의 항미원조지원군이 제4차 전역 1단계(1951년 1월 27일~2월 16일)를 끝내고, 5차 전역(1단계 1951년 4월 22일~30일까지 9일간, 2단계 1951년 5월 16일~22일까지 6일간)이 시작될 무렵이다.

 

임경석 교수가 요약 자문해 준 당시 전황이다.

 

“제3지대가 횡성군을 출발한 2월 14일 즈음에 횡성 일대는 격전지였습니다. 6.25전쟁사에서 유명한 횡성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던 때입니다. 남진해 오는 중국지원군의 제4차 공세, 이른바 ‘2월 공세’로 인해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습니다. 중국지원군 11개 사단이 전면에 집중, 북한군 2개 군단(제5군단, 제3군단)이 지원군으로 배치됐습니다. 한국군 3개 사단과 미군 1개 연대가 최전선에 배치하여 대치선을 형성했지요. 2월 11~13일에 걸쳐서 전투가 있었고 국군 3개 사단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3사단, 5사단, 8사단. 그중에서도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이 큰 곤경에 처했습니다. 사단 사령부와 예하 연대 사이에, 연대 상호 간에, 그 예하 부대 간의 통신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3개 연대 모두가 포위된 상태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결국 장교 323명을 포함 7,465명의 병력이 사망 혹은 실종했고, 3천여 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전체 병력의 30%만 생환할 수 있었습니다. 대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휘부 미군 제10군단장과 제8군 사령관은 횡성을 포기하고 원주를 방어하는 작전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6.25전쟁사> 제8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290~300쪽)

 

박종근 제3유격지대 사령관의 유격 활동과 재귀열병

 

임경석 교수는 『독립운동 열전』(푸른역사, 2022)에서 박종근 제3유격지대 사령관 유격대 활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1951년 2월 14일 박종근은 제3유격지대를 이끌고 서둘러 둔내면을 출발했다. 4월 20일까지 보현산(1,124m) 지역으로 진출하여 근거지로 만든 후 그곳에서 유격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경북 영천군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이 산은 대구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출발 당시 병력 총수는 356명이었다. 각자 소총 1자루와 탄환 40발이 지급됐다. 수류탄을 평균 1.3개씩 소지했다. 공용화기는 경기관총 2정뿐이었다. 무기도 빈약했는데 대원들의 전투력 또한 문제였다. 70퍼센트가 경북 출신으로서 후퇴 시에 입산했던 사람들이었다. 대중사업과 군중정치운동에 종사하던 당원들로서 군사 경험이 없는 동무들이었다. (중략) 그가 내심 기대했던 수준은 훈련된 군사간부가 지휘하는 1,000명의 병력이었다. 당 중앙과 유기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조건 아래 이 정도 병력을 갖춘다면, 보현산 지구를 근거지로 제2전선 구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났다. 4월 20일이 됐을 때 제3지대의 상황은 출범 당시의 계획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가장 큰 곤란은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숫자와 장비, 기동력이 월등히 우세한 정규군이 밀집한 지역을 뚫고 이동하는 것은 많은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계속되는 전투와 쉴 새 없는 행군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전사, 낙오, 실종 등으로 인해 257명의 대원이 감소했다. 그 대신 낙오된 북한군 편입, 경북 관내 지하당원들의 편입 등으로 121명이 보충되어 전체 대원 수는 220명 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환자가 43명이었다. 사령관인 박종근조차도 재귀열병에 걸려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한 달 이상 병고에 신음해야 했다.”

 

1951년 봄부터 재귀열이라는 열병이 유행해 제3지대는 곤란을 겪었지만, 지춘란이 의료 요원으로 최선을 다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춘란 부군 황금수는 “박종근 사령관이 총상을 입었을 때 지춘란을 찾았다고 한다. 지춘란이가 오면 살 수 있다”라고 증언한다. 추측건대 박종근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하면서 재귀열뿐만 아니라 총상 등에도 뛰어난 의료 활동을 한 것 같다.

 

1951년 봄부터 산중에서 재귀열이라는 열병이 유행해 수많은 빨치산의 생명을 앗아갔다. 빨치산은 재귀열이란 전염병으로 변변한 약도 치료시설도 없는 상황에서 죽어갔다.

 

 

미군의 세균전, 재귀열

 

수많은 빨치산의 생명을 앗아간 재귀열은 곳곳에 기록이 남아 있다.

 

재귀열이라고 분명하게 쓰인 것으로는 15살의 나이로 전남 빨치산 활동을 한 김영승 씨의 『김영승 회고록』(통일뉴스, 2022)이 있다. 또한 열병으로 이야기한 것으로는 『남부군』(이태, 두레, 2014), 『양원진 자서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민가협양심수후원회, 2018), 『빨치산의 딸』(필맥, 2023) 등이 있다.

 

그리고 『태백산맥』(조정래, 해냄, 2016) 8권: 제4부 전쟁과 분단 11장(재귀열이란 돌림병)에서 자세히 나온다.

 

“한편, 전남의 모든 지구에는 도당의 비상령이 내려져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였다. 환자들은 날로 급증해서 지구마다 절반 가까이가 앓아눕는 형편이었다.

 

위생을 위한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

 

이런 구호 아래 모든 대원들에게 방역 교육이 실시되고, 방역 대책을 강구시켰다. 방역 대책은 다름 아닌 이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 전염병은 재귀열이고, 그것을 전염시키는 것은 이나 벼룩·빈대로 밝혀졌던 것이다. 치료약이 없는 상황에서 감염의 주범인 이를 소탕하는 것은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중략)

 

그런데 방역 문제와는 별개로 전남도당의 빨치산 지구에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재귀열이란 전염병은 미군 비행기가 뿌린 병균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병이 발생하게 된 원인 규명인 동시에 미군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소문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폭격기가 아닌 정찰기가 이상하게 아주 낮게 떠서 산골짜기 골짜기마다 날아다닌 삼사일 뒤부터 그 병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비행기는 삐라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귀순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 때문에 산골짜기마다 그렇게 낮게 떠서 날아다녔느냐는 것이었다. 빨치산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정찰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빨치산들이 정찰기에 노출될 만큼 낮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적들이 먼저 아는 것이고, 정찰기의 비행은 자주 있었지만 그런 식의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나 벼룩·빈대가 옮기는 병이 그것들이 갑자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날짜의 차이도 없이 그 넓은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비행기로 병균을 살포하지 않고서야 전북 산악지대에서부터 전남 산악지대까지 어떻게 그리고 일시에 병으로 뒤덮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중략)

 

4월이 남긴 것은 산과 들의 푸름뿐인 채 5월이 시작되려는 즈음에 전남도당은 병력의 3할을 잃고 말았다.”

 

▲ 1952년 당시 미군이 세균을 살포한 38선 이북 지역 지도(자료 :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세균전에 대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보고서

 

『나무위키』 조선인민유격대 설명에는 “경상도 지역에는 발병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라고 나와 있지만, 제3유격지대 활동 무대는 경북 영천군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 그리고 대구 인접 일대였다.

 

그리고 『양원진 자서전 곡절 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에는 “4월 말경에 평안북도 영미에 도착해서 휴식할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우물가에 가서 옷을 벗었는데 오싹했다. 미국 놈 세균무기에 전염되어 열병이 발병했다. (중략) 연대장 간호사가 새벽에 10리 이상 되는 거리를 와서 비상용 주사를 놓고 갔다. 그 덕으로 열병을 가볍게 앓고 일어났다”라고 증언했다.

 

이런 사실로 보아서는 빨치산 거점이 있는 산이나 조선인민군 상주 부대 지역에 세균전이 벌어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세균전에 대한 시기는 다르지만,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쟁 기간 중 제기되었던 세균전 문제 역시 그 진실 여부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공산군 측에서는 미군 비행기가 세균무기를 투하하여 북한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면서, 국제기구 인사들을 북한에 초청하여 조사를 실행했다. 당시 북한과 중국에서 조사를 벌인 국제기구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와 ‘국제과학조사단’이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보고서 내용은 <자료 61>과 같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1946년 프랑스에서 조직되어 오늘날까지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권위 있는 기관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작성한 보고서는 <자료 61>에서 인용한 세균전 외에도 미군이 자행한 것으로 보이는 화학전, 그리고 민간인학살 등에 관한 내용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다. 만약 이 보고서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미군은 인도적 측면에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자료 61>의 결론 부분이다.

 

“미국 군대는 북한 인민군을 반대하며 북한의 일반에게 죽음과 질병을 만연시킬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세균을 감염시킨 사례와 파리와 기타 곤충들을 고의적으로 산포함으로써 1907년 육전법규와 관습에 관한 헤이그 협약의 조문을 위반했으며 1925년 제네바 의정서에서 재확인한 세균전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가장 엄중하고 전율적인 범죄를 한국에서 범하였다. (하략)”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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