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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2의 쿠바, 아이티 공화국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4/03 [07:29]

[기고] 제2의 쿠바, 아이티 공화국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4/03 [07:29]

제2의 쿠바와 체 게바라가 탄생할 것인가!

 

중남미 마지막 미국의 식민지 카리브해의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 아이티)이 요동치고 있다. 빈민가 출신 지미 셰리지에(Jimmy Chérizier)가 부르주아 혁명을 내세우며, “무장 투쟁”을 이끌고 있다.

 

미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미 셰리지에가 심각한 인권 유린 행동을 저질렀다고, 경제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셰리지에는 그들을 오만한 제국주의로 보고 “과거 방식으로 아이티인을 학대하는 유엔군을 용납치 않겠다”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 이란, 북한 등은 주로 반미 자주국들이다.

 

보다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외신과 국내 언론은 아이티 상황에 대해 갱단에 의해 공권력이 붕괴한 나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지도자 셰리지에에 대해서도 갱단 FRG9(Family and Allies G9) 지도자로 몰아가고 있지만, 일부 외신들은 다르게 소개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종합 일간지로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이며 외신란이 유명한 가디언(The Guardian)과 세계 유수의 시사지 가운데 하나로 세계 경제와 관련된 국제정치의 전개와 전망에 정평이 나 있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반외세 자주 무장 투쟁으로 보도했다.

 

극과 극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언론은 미국과 서방 언론을 받아쓰기, 아니 베끼기로 언론 노예화되는 중이다. 일단 미국이 제재 등으로 거품을 물면, 국내 언론은 의심하고 확인해야 하는데 한심하고 창피하기 짝이 없다.

 

아이티의 체 게바라(1928~1967), 지미 셰리지에

 

지난 3월 10일 가디언지는 ‘지미 셰리지에’에 대해 소개했다.

 

“그가 지배하는 가난한 아이티 빈민가의 벽화들은 그를 아르헨티나 게릴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에 비유했다.

Murals in the pauperized Haitian slums he rules liken him to the Argentinian guerrilla Ernesto “Che” Guevara.

 

인터뷰에서 그는 신을 두려워하는 카리브해 로빈 후드로 자세를 취하고 피델 카스트로, 토마스 산카라, 말콤 X를 포함한 자유 투사와 운동가들을 찬양한다.

In interviews, he poses as a God-fearing Caribbean Robin Hood and celebrates freedom fighters and agitators including Fidel Castro, Thomas Sankara and Malcolm X.

 

아이티 갱단의 두목 지미 셰리지에는 작년에 뉴요커 기자 존 리 앤더슨과 만났을 때 ‘나도 마틴 루서 킹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총을 가지고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총을 가지고 싸운다.’

‘I like Martin Luther King, too,’ the Haitian gang boss Jimmy Chérizier told the New Yorker journalist Jon Lee Anderson when they met last year. ‘But he didn’t like fighting with guns, and I fight with guns’”

 

(중략)

 

“지난 5년 동안 아리엘 헨리 총리에 대한 갱단 봉기의 주요 대변인으로 등장한 아이티 무법자는 자신의 고귀한 것을 정당화하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의 갱 지역에 외국 기자들의 연속 취재를 환영했다.

Over the past five years the Haitian outlaw – who has emerged as the main spokesman for the gang uprising against Prime Minister Ariel Henry – has welcomed a succession of foreign reporters to his gangland domain hoping to justify what he calls his noble – if bloody – crusade to defend his country’s famished urban poor.

 

‘난 도둑이 아니다. 납치와도 상관없고 강간범도 아니다’, 셰리지에는 지난해 총알이 박힌 집 밖에 앉아 있던 중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단지 사회적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I’m not a thief. I’m not involved in kidnapping. I’m not a rapist.’ ‘I’m just carrying out a social fight,’ Chérizier told the Associated Press last year while sat outside a bullet-pocked house.

 

2022년 Vice(미디어그룹)와의 인터뷰에서 셰리지에는 자신의 초라한 빈민가 군대를 ‘취약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싸우고 있는 사회 정치적 조직과 힘’이라고 불렀다.

In a 2022 interview with Vice, Chérizier called his ragtag favela army ‘a sociopolitical structure and force that is fighting on behalf of the vulnerable’.”

 

미국 언론 받아쓰는 국내 언론, 지미 셰리지에를 갱단 두목으로 소개

 

지난 3월 12일 이코노미스트는 ‘지미 셰리지에’의 정치적 야망을 소개했다.

 

셰리지에는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 지도자들이 과도 정부의 윤곽을 논의하는 동안 그는 국가 밖에서 이루어진 결정이 아이티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자신의 그룹이 “지금 아이티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알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Mr Chérizier appears to have political ambitions. As foreign leaders discussed the contours of a transitional government, he warned that decisions made outside the country would plunge Haiti into ‘further chaos’. He claimed that his group would “figure out how to get Haiti out of the misery it’s in now”.

 

그러나 국내 언론은 정반대로 지미 셰리지에를 갱단 두목으로 소개했다. 

 

지난 3월 11일 자 한겨레신문 기사이다.

 

“아이티에서는 아리엘 앙리 총리가 외국 방문을 나선 지난 2월 말부터 조직범죄단 세력의 반정부 폭력 사태가 더욱 격화됐다. 케냐 방문을 마쳤던 앙리 총리는 조직범죄단들이 그의 귀국을 저지하려고 공항을 공격해 교전 사태가 벌어져, 귀국을 못 하고 지난 5일 푸에르토리코에서 기착한 뒤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이다. 그는 아이티에 유엔 후원의 다국적군 파견을 요청하려고 케냐를 방문했다.

(중략)

 

9개 조직범죄단 ‘지나인’(G9) 연합의 수장 지미 셰리지에는 앙리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며 반정부 폭력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

(중략)

 

아이티는 지난 2021년 7월 7일 조브넬 모이즈 당시 대통령이 콜롬비아 용병들에게 암살당한 뒤부터 조직범죄단들의 폭력 사태에 휘말려 왔다. 프랑수아 두발리에 부자의 29년간 장기독재정권 동안 두발리에의 용병 세력과 연관된 조직범죄단들은 모이즈의 집권 동안 세력을 확장했다. 바비큐라는 별명을 가진 셰리지에는 지난 2020년 지나인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적어도 아이티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지미 셰리지에’에 대한 미국 언론을 그대로 받아쓴다는 것은 역사 무지요, 무시이자 아니 민중사기이다. 아이티는 19세기 프랑스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벌여 세계 최초로 흑인 공화국을 세운 자주 혁명 국가였다.

 

세계 최초의 흑인 혁명 국가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 큰 섬 에스파뇰라(La Española, 스페인어)섬은 에스파냐(스페인)령으로 스페인 첫 식민지였다. 현재는 아이티공화국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양분되어 있다. 

 

스페인은 초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은 광산 개발에 집중했으나, 17세기 중반이 되자 은 생산량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래서 새롭게 찾아낸 것이 플랜테이션이었다. 스페인은 에스파뇰라섬에 사탕수수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런데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유럽인들이 전파한 전염병과 극심한 노동착취로 20살도 채 못 살고 몰살되었다.

 

스페인은 대규모 생산을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에스파뇰라섬에 데려온다. 아이티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 흑인 비중이 높은 이유이다.

 

프랑스·스페인 전쟁(1635~1659년)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1697년 에스파뇰라섬을 정복하고, 식민지까지 양도받아 프랑스령으로 ‘생도맹그’(Saint-Domingue)라 불렀다. 이곳은 전 세계 커피와 설탕의 절반이 생산되었고, 대서양 노예무역의 3분의 1이 이뤄졌다. 

 

프랑스는 생도맹그를 해외식민지 중 가장 번성한 곳으로 만들었다.

 

생도맹그는 프랑스 혁명 발발 2년 뒤인 1791년, 흑인혁명이 발발한다. 흑인 노예들이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라는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인권선언에 고무되어 봉기한 것이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는 전 노예이자, 노예 반란의 지도자였다. 생도맹그 5만의 흑인군대가 유럽 열강의 군대를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아프리카의 부족 싸움 전술과 유럽의 기병·보병 연합전술을 함께 구사했던 혁명의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끄는 흑인군대는 백인 지주들을 처형한 뒤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식민지를 침범하려는 스페인군과 영국군을 모두 물리쳤다. 

 

그는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해방하라고 주장하는 등 대담한 조치로 안정과 영토 회복을 꾀하였다. 또한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무역 계약을 갱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1804년 독립을 선언했다.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해방 노예로 구성된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이 탄생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독립국이자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국가가 출범한 것이다.

 

‘아이티’란 국호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원 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란 의미였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은 몰락했으나, 아이티인들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독립국가로 남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겠다는 의욕으로 남미에서 스페인제국과 싸우고 있던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의 독립운동도 지원했다. 아이티는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 독립국가였다. 

 

1810∼1820년대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주역인 시몬 볼리바르가 두 번씩이나 아이티로 피신하고,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인 페티옹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를 지원했다. 이는 중남미 특유의 열강에 의한 식민 아픔에 대한 국제적 유대감이었다.

 

미국의 침공과 미군정으로 아이티 최빈곤국으로 전락

 

세계 최초로 흑인 노예들에 의해 주도된 노예혁명과 헌법에 따라 수립된 흑인 공화국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틈타 미국은 아이티를 침공한다.

 

카리브해 아이티는 북미와 남미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제1차 세계대전 무렵 독일은 아이티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 내심 독일을 경계하던 미국이 아이티에 채무 상환을 구실로 해군기지를 빌려달라 요구하자, 아이티가 이를 거절했다.

 

1915년, 미국은 해병대를 파견하여 아이티의 친독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미군정을 1934년까지 실시한다. 이때 수십만 명의 아이티인은 쿠바와 도미니카공화국에 망명했다. 

 

아이티 현대사를 연구해 온 벨기에 루뱅대 법철학센터장 마크 마스할크와 ‘아이티 발전과 평화 사무소’의 장클로드 장 소장이 경향신문에 보낸 기고문(2023년 9월 25일) 일부이다.

 

“노예무역을 해 오던 다른 강대국들은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노예 소유주에게 1억 5,000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1825년에야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다. 헷갈리면 안 된다. 프랑스가 아이티에 식민지 배상금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티에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금액은 당시 아이티 정부의 연간 수입보다 10배나 많은 금액이었다.

 

아이티는 미국, 프랑스, 독일 은행에서 고금리 대출을 받아 1947년까지 123년 동안 배상금을 지불했다. 에펠탑 건설에 자금을 지원한 프랑스 은행 CIC도 아이티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글로벌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아이티는 빚을 갚느라 빈곤국으로 전락해 갔다.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했다. 아이티가 내전 끝에 떨어져 나간 도미니카공화국과 국경분쟁을 벌이자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아이티를 미국의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국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군정통치하면서 아이티를 군부의 입김이 큰 나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0년 1월 12일. 규모 7.0의 초대형 지진이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했다. 당시 아이티 인구 984만 명 가운데 20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최빈국인 아이티는 재해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해 10월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됐다. 유엔군이 콜레라를 옮겨오면서 아이티에서는 2016년 말까지 9,500명이 사망했다. 옥스팜 직원들이 아이티 대지진 구호 현장에서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엔군 역시 이 기간 여성과 어린이를 상대로 성적 학대를 저지른 사실이 인권단체를 통해 밝혀졌다. 결국 유엔군은 2017년 아이티인의 분노 속에 쫓겨나듯 철수해야 했다.”

 

미국의 개입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 940호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한 것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940호였다.

 

1994년 유엔 안보리 결의 제940호는 국제 관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유엔이 회원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군사적 개입을 처음으로 허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는 초기에는 개입을 반대하였고, 대다수 안보리 위원국도 국내문제로 간주했다. 그러나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안보리 위원국들은 쿠데타를 비난하고 미주기구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중국 등 일부 국가들은 유엔의 국내문제 개입을 우려하였다.

 

1994년 이후 아이티군의 해체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반정부 무장 세력에 대해 정부 측은 무력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 제940호로, 다국적 임시군(MIF)의 현지 파견을 승인했고, 3월 1일에는 미군을 주력으로 유엔군이 아이티에 상륙했다. 

 

2004년 4월 20일에는 안보리 결의안 1542호가 채택되어 MIF의 후속으로서 브라질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유엔 아이티 안정화 미션’(United Nations Stabilisation Mission in Haiti, MINUSTAH)을 설립하고, 평화유지활동(PKO)과 치안 회복 등을 하고 있다.

 

2010년 1월 12일에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진도 7.0의 강진으로 인해 큰 피해가 났으며, 진도 5.0의 여진만 20여 차례가 잇따랐다. 이 사태로 정부 기능은 마비가 되어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지난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당시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후 지미 셰리지에는 아이티의 “부패한” 정치 엘리트들에 맞서 혁명을 추진하고 있다. 모이즈 대통령 타계 이후, 지금껏 아이티엔 새로운 대통령이 없다. 

 

2016년 이후 대통령 선거는 열리지 않고 있다.

 

아이티는 중남미 최빈국이다. 오늘날 문맹자의 비율이 전 국민의 절반을 넘고 80%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인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동시에 일어난 흑인혁명과 자주적 무장 해방 투쟁의 역사를 품은 작은 거인의 나라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최초로 성공한 노예혁명과 흑인국가 아이티는 그 영광만큼이나 제국주의 침탈이 끝이 없었다. 

 

국제사회를 떨게 한 흑인 노예해방은,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제국주의의 식민나라들을 자극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떠받치는 버팀목의 하나인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구미 열강 그리고 미 제국주의는 철저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며 아이티를 망가뜨리려고 했다. 

 

구미 열강과 미국에는 아이티가 혁명 실패 국가의 전형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심사가 뒤틀려 무장 흑인혁명의 성공을 지켜볼 수 없었다. 이것은 제국주의가 철저하게 기획한 아이티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동시에 일어난 흑인혁명, 무장 해방 투쟁의 역사를 품은 작은 거인, 아이티에 또다시 혁명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지미 셰리지에는 빈민가와 주민들을 돕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 “무장 혁명”을 이끌고 있다. 셰리지에는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과 이를 지배하는 기득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면 모든 아이들의 손에 총을 쥐여줄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또한 그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결코 나와 같은 사회 계층인 주민들을 학살하지 않을 것 (중략) 나는 빈민가에 산다. 나는 빈민가의 삶이 어떤지 잘 안다”라고 덧붙였다.

 

셰리지에는 자신의 “무장 혁명”은 오직 주거, 식량, 깨끗한 식수 등 빈민가와 가난한 이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면서, 성원들은 자신에게 이를 이룰 정치적 힘이 돼 준다고 주장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남긴 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이번 4.10총선에서 우리 민중의 역사를 비극에서 희극으로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반제·자주·민주·평화애호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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