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주 4.3항쟁 76주년이다.
76번째 봄이 찾아왔지만 4.3이 도달해야 할 길은 너무도 험난하다.
제주 4.3 학살은 이승만이 원흉이고 책임자는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 그리고 배후는 미국인데, 미국은 거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48년 5월 12일,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 진압을 위해 구축함을 급파하고, 브라운 대령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현지 군대가 아닌 미군 지휘관을 진압 작전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거의 없다.
또한 1948년 5.10선거 이전 미군정 하지 장군이 미군 개입 금지를 지시했던 것과 달리, 선거가 끝난 뒤 야전군 지휘관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파견한 것은 4.3을 구실로 남쪽만의 친미 단독정권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명백히 미국이 관여된 것이다.
제주 4.3에 대한 미 국무부 입장
제주 4.3 70주년, 2018년 10월에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이 4.3에 대해 미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10만 9,996명의 서명을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미 대사관 쪽은 그동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한겨레 신문 기사에 미 국무부가 제주 4.3에 대해 문서로 입장문을 밝혔다. 제주 4.3항쟁이 발생하고 76년 만에 처음이다.
“미 국무부가 제주 4.3에 대해 ‘비극적인 사건’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제주 4.3 당시 한반도 남쪽을 군정 통치(1945년 9월~1948년 8월)했던 미국은 사건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지금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왔다.
미 국무부는 최근 ‘제주 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라는 한겨레의 이메일 질의에 ‘1948년의 제주사건은 참혹한 비극(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답신을 지난달 27일 보내왔다. (중략) 실제 제주 4.3 시기 미군정이나 군사고문단,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 진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정부가 2003년 10월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4.3사건의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미군정보고서는 1947년 제주 3.1사건 이전까지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에 부화뇌동해 일어난 소요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보고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에서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한다.
“1948년 초까지 제주도에서 실질적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한 것은 좌익 인민위원회였다. 1945년 8월에 처음 출현한 인민위원회는 미군 점령기(1945~48)에도 지속되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에 어떤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제주도를 아예 무시하기로 했다. (중략) 이들은 북한과 의미 있는 유대가 전혀 없었고, 본토의 남로당과도 거의 연계가 없었다. 제주도는 1945~47년 동안 평화롭게 잘 통치되어 본토와는 대비되었다.”
그러면 왜 제주 4.3이 일어났는가?
제주 4.3의 원인, 경찰과 서북청년단
브루스 커밍스는 같은 책에서 제주 4.3의 원인을 경찰과 우파 청년단체의 테러에 있다고 보았다.
“이승만이 권좌에 올라 관료들을 제압하고 반란을 외부의 공산주의 선동가들 탓으로 돌리기 전까지는, 미군정의 한국인들은 반란의 원인이 제주 인민위원회의 오랜 지배와 뒤이은 경찰과 우파 청년단체의 테러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 장군은 1947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회 의원단에 제주도는 ‘인민위원회가 코민테른의 큰 영향 없이 평화롭게 통제하는 진정한 자치지역’이라고 말했다. 그 직후 미군정 조사단은 제주도 ‘주민의 대략 2/3’가 자신들이 보기에는 ‘온건한 좌파’라고 추정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
또한 미군정보고서도 경찰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제주 4.3을 촉발한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4.3이 일어나자 미군정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들의 토벌을 ‘레드 헌트(red hunter, 빨갱이 사냥꾼)’로 명명했다. 이들은 제주도 인민을 ‘사냥’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장관 윌리엄 딘(W. Dean)은 4월 16일 경비대의 합동작전을 명령하는 등 제주도 진압을 지휘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같은 책에서 우파 청년단체의 무장대 진압에 대해 말한다.
“섬 주민들의 화를 부른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서북청년단으로 알려진 우익 테러집단을 풀어 좌익 세력을 억제하고 전향시키려 했던 일일 것이다. 1947년 말 미군 방첩대는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자행한 ‘광범위한 테러행위’에 대해 ‘경고했다’. 바로 그 동일한 서북청년단이 미국의 통제를 받아 제주도에서 경찰에 합세하여 유격대 진압 작전에 나섰다.”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 그리고 진압 작전 책임자로 미군 지휘관 파견
무장대는 궐기하면서 전 제주도민과 권력기관 및 반동 단체의 성원에 대해 호소하였다.
특히 경찰관과 군인에 대한 호소문 일부이다.
“친애하는 경찰관 여러분! 탄압하면 항쟁할 뿐이다. 제주도 빨치산은 민중을 수호하고 민중과 함께 한다. 항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민중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경찰,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있는가? 한국 민중이라면 조국과 민중을 유린하는 외적을 내쫓는 투쟁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반역자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총구는 놈들에게 향하라. 결단코 여러분의 부모 형제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1948년 4월 28일 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흘만인 5월 1일 세칭 ‘오라리 방화사건’이 벌어지면서, 5월 3일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의 증언이다.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특히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을 미군 촬영반이 공중과 땅에서 촬영하였는데 폭도들이 방화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 편집했다. 이후 미군정은 김익렬을 연대장에서 해임하고, 강경파 박진경을 임명한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식에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강경 발언을 한 자이다.
그리고 1948년 5월 제주도 최고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기자회견에서 “사건 원인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강경 진압을 암시했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8일)
제주 4.3은 집단학살이다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됐다.
제주 4.3 희생자의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당시 제주도 도민이 30여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3만 명이라고 해도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되었다. ‘8만 명 희생설’도 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었다 한다, 그런데 어떻게 3만 명이 희생될 수 있었단 말인가!
2001년 5월 제주 4.3사건 지원사업소가 접수한 희생자 신고에 의한 피해자 1만 3천여 명 중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또 이것은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
이것은 지원사업소가 접수한 희생자 신고를 분석한 결과이지만,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특히 무장 경찰관과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 등이 저지른 ‘삼광삼진(三光三盡) 작전’ 만행은 너무 끔찍했다. 이것은 왜놈들이 독립군을 잡을 때 쓰는 방법으로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앴던 것을 제주도민에 무차별 사용해 학살한 것이다.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 중 80% 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행히 2019년 국방부는 처음으로 “제주 4.3 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경찰청장도 추념식에 참석해 헌화했다.
처음으로 공식 사과 입장을 밝혀, 그나마 영령들에게 다소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제주 4.3 집단학살의 배후, 미국은 아직도 공식 사과가 없다.
진실 규명과 국가 공식 사과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 4.3항쟁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라고 밝혔다.
또한 제주 4.3사건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의 규정에 의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희생에 대해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추도사 등을 통해 국가 원수로서 공식 사과를 했다. 박근혜 정부도 ‘4.3 희생자 추념일’을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어서 1999년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2000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했고, 2021년 그 개정안이 통과되어 2022년 4월부터 시행되었다.
그뿐 아니라 2022년 4월 3일 대통령(당선인) 자격으로 윤석열은 제주 4.3 추념식에서 “희생자들의 영전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중략)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4.10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열린, 올해 제76주년 제주 4.3 추념식에 윤석열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불참했다.
윤석열의 본색은 2022년 12월 9일 ‘뉴라이트의 이념적 대부’와 ‘체제 보위 역사전쟁’을 담당할 자로 김광동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이미 확인됐다.
김광동은 지난 2011년 6월, 4.3사건 교과서 수록 방안 공청회에서 “제주 4.3은 남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이라고 말한 자다. 그는 과거 논문이나 저작, 토론회 등에서 독재정권을 미화하고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면서 배후로 북을 지목했을 뿐 아니라 과거사 정리의 의미와 필요성을 부정한 자이다.
광화문에서 ‘태극기 부대’의 극우 성향 목사나 인물들이 쏟아내는 선동 주장과 거의 똑같다.
윤석열이나 국힘당이나 김광동이나 초록이 동색이고, 사대·종미·매국·반민족·친일세력이다.
제주 4.3항쟁은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정권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 싸운 자랑스러운 자주·민주·통일 역사이다.
역사는 저절로 전진하지 않는다!
민중의 힘을 믿고, 4.10 22대 총선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역사전쟁을 끝장내자!
민중은 윤석열과 국힘당을 포위하여, 4.10총선에서 확실히 응징하여 윤석열을 끌어내리자!
반제·자주·민주·평화애호세력은 총단결하라!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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