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춘란은 제3유격지대 사령관인 박종근 부대에 배속되어 간호 요원으로 활동하다, 뒤에 일월산에서 제3지대장 남도부를 따라 남하한다.
당시 남도부는 일월산으로 북상 중이었다.
일월산 북상 이유는 지도권 분쟁 해결을 위한 상급 당 기관의 확인을 위해서였다. 당시 일월산은 대남 정보 및 대북 연락의 접선지였다.
남도부는 전쟁 전 새로 재편된 인민유격대 제7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예하 빨치산 300여 명을 이끌고 군함을 타고 침투한다. 이때 남도부의 관할구역은 ‘동해 남부 전구’로 경남의 울산, 언양, 양산, 동래, 밀양과 경북의 경주, 청도 등이었다. 여기에 신불산(1,209m),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 고현산(1,083m) 등 해발고도 1천 미터 이상의 산악도 있었다.
그런데 1951년 8월 31일 중앙당의 6개 지대 개편 지시로. ‘동해 남부 전구’가 경남도당 관할로 되면서, 새 사령관이 오게 되어 남도부의 관할과 지도권이 없어지게 된다.
남도부는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대북 접선지였던 일월산으로 간 것이다. 일월산에는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있었다.
남도부가 일월산에 간 두 가지 이유
임경석 교수는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 ‘8장 산에서 쓴 편지’에서 일월산에 간 두 가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첫째, ‘도당 및 중앙당과의 연결’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남도부 부대는 파견 이후 줄곧 중앙당과의 연락선이 단절되어 있었다. 그 관할구역인 경남 동부지역은 전쟁 기간 한 번도 북한군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서 남도부 부대의 전투 구역은 줄곧 ‘적진’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남도부 부대는 파견 이후 한 번도 중앙당과 연락을 취해본 적이 없었다. 보고와 지령의 교환은 물론이고, 전투 장비와 물자의 보급도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도부 부대는 중앙당과의 연락선 회복을 위해 1950년도에 세 차례나 연락대를 북상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1951년에 들어서는 전황이 더욱 악화했기 때문에 연락선 회복을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중앙당과의 연락만 곤란했던 것은 아니다. 인접 도당과의 연락도 쉽지 않았다. (중략) 둘째, ‘남도부 부대 중앙연락대’가 일월산으로 출발한 까닭은 조용구와의 지도권 분쟁 때문이었다. 1951년 6월경 지리산에 위치한 경남도당 위원장 노영호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50명의 대원이 신불산 지구에 도착했다. 그 지휘자는 조용구였다. 그는 심각한 주장을 내세웠다. 경남도당 위원장에게서 동해 남부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도부와 안병렬을 비롯한 기존 지도부는 이 주장을 접수할 수 없었다.”
2개의 사령부가 두세 달 공존하면서 대립하게 되었다.
남도부는 이 상태를 더는 방치할 수 없어, 직접 상급 당 기관과의 접촉을 모색하기 위해 50여 명의 대규모 ‘중앙연락대’를 이끌고 일월산으로 북상한 것이었다.
북한군 총사령부 김일성 지시, 제2전선 유격 활동 강화 명령
중국인민지원군의 펑더화이 사령관은 참전 후 1950년 11월 13일, 항미원조 제1차 전역을 총결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1차 당 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북한군에 대해서 UN군 배후에 침투해 제2전선을 구성하여, UN군의 후방 병참선을 교란함으로써 전체 작전에 기여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호응하여 김일성 수상도 11월 17일 제2군단장 최현에게 제2전선 유격 활동 등 작전 방침을 설명하고 임무를 주었다.
또한 이후에도 유격대 활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할 것을 명령했다.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에 실린 이선아의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의 형성과 활동」 연구 논문이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기로 접어드는 1950년 12월 9일, 김일성은 다시금 ‘평양시 해방에 즈음하여’라는 방송에서 ‘후퇴하는 적들에게 숨 쉴 사이를 주지 말며, 새 방어선을 구축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라고 연설했다. 곧이어 1951년 1월 2일의 최고사령부 명령 2호는 ‘적후에 있는 유격대들의 활동을 확대, 발전하는 데 대한 명령’으로 제6지대를 결성하여 ‘적의 조직적 후퇴를 불허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1월 25일의 최고사령부 명령 제74호는 ‘전 인민을 유격 조직화함으로써 유격대의 기관을 더욱 공고, 확대, 강화할 목적’으로 충남북 일대에 2지대를 결성, 생산유격대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할 것을 명령했다.”
특히 북한군의 재차 남진에 호응해서 제2전선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도록, 이남 각지의 유격부대에 당 활동을 이차적으로 하고 군사 활동만을 위주로 하는 ‘지대’로의 개편을 지시한다. 명령은 전파로 발송됐지만, 이남 산 중에는 전파 통신 수단의 미비로 그것을 접수한 부대는 없었다.
그러나 박종근의 경북도당 유격대는 다행히 영주군 부석면으로 남하해 온 북한군 2군단을 만나 중앙당에 보고서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지대 개편 명령을 실현한 것은 경북도당 유격대뿐이었다.
북한군 최고사령부가 지시한 지구당 개편 내용 및 활동 범위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북상하던 남도부는, 일원산에서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과 만나 당시 6개 지구당으로 개편된 내용을 듣는다. 북한군 최고사령부가 지시한 지구당 개편 내용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남도부 빨치산 생존자 성일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정원석 장편소설 『북위 38도선(하)』(교학사, 2006)와 『남부군, 이태 지음』(두레, 2014)을 중심으로 대략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제1지대 태백산지구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로 편성 제1지구당 : 서울, 경기도 전 지역 제2지구당 : 울진군을 제외한 남부 강원도 전 지역
▲ 제2지대 충남북의 유격대와 원주지방의 ‘홍사민연대’로 편성하고 속리산, 영동 부근, 계룡산에 각 거점을 설정한다. 제3지구당 : 논산군을 제외한 충청남북도 전 지역
▲ 제3지대 남도부 부대와 경북도당의 박종근 부대 및 일월산·보현봉 일대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들로 구성한다. 제4지구당 1. 경북 및 강원도 울진군(박종근) 2. 청도군 및 경남의 낙동강 이동(남도부)
▲ 제4지대 이현상을 지대장, 김선우(전남도당 부위원장)를 정치위원으로 해서 지리산, 덕유산, 운정산에 각 거점을 설정한다. 제5지구당 : 낙동강 이서의 경남
▲제5지대 길원팔을 지대장으로 하고 남경우(경남도당 위원장)를 정치위원으로 해서 경남북 유격대와 청도 유격대로 편성 운영, 운문산과 관용산에 거점을 확보하고 울산에서 부산, 마산, 산청에 이르는 지구를 활동 구역으로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령이 시달됐을 무렵에는 길원팔은 이미 북상하고 없었다.)
▲제6지대 무주, 옥천, 영동, 보은, 금산 등의 각 군 유격대로 편성하고 같은 지역을 활동 구역으로 한다. 제6지구당 : 충북 논산군 및 전라남북도 1. 충북 논산군 및 전북 전 지역(방준표) 2. 전남 전역 및 제주도(박영발)
남도부는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에게 설명을 듣고, 관할구역과 지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의회를 개최했다. 회의 명칭은 ‘경북도당부·동해남부전구 빨치산 중앙연락대 협의회’였다.
경북도당부·동해남부전구 빨치산 중앙연락대 협의회(협의회) 결정
임경석 교수는 같은 책에서 협의회 문건은 분실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남도부 성원 성일기의 『북위 38도선(하)』를 근거로 결정서를 추론했다.
“첫째, 기존의 도당 조직을 해체하고 그 대신에 남한 전역을 6개의 지구당으로 재편한다는 중앙당 결정에 따라서, 경북도당과 동해 남부 지구당을 합해 제4지구당으로 개편한다. 제4지구당의 위원장은 박종근이 맡되, 그는 구 경북도당 구역을 직할한다. 구 동해 남부 지구 당 단체는 부위원장 이영섭(李英燮)이 지도한다. 둘째, 제4지구당 관할구역 내의 유격대를 제3지대로 개편한다. 구 경북도당 관할의 태백전구는 제3지대장 박종근이 관장하며, 구 동해 남부 전구는 제3지대 부지대장 남도부가 관장한다. 달리 말하면 구 동해 남부 전구의 당과 군대 조직을 경북도당 산하에 배치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제 ‘동해 남부 전구 빨치산 부대’는 ‘인민유격대 제3지대’로 바꿔 부르게 됐다. 또한 ‘동해 남부 지구당’은 ‘제4지구당’ 소속으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이 결정은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겨졌다. 안병렬의 편지에는 ‘남도부 동무는 다시 동해 남부 지구로 경북도당 부위원장과 함께 지난 10월 22일 출발’했노라고 적혀있다.”
이 결정으로 남도부 부대의 지도권 분쟁도 해소됐다. 이때 지춘란은 일월산에서 박종근과 헤어져 남도부와 함께 남하한다.
황금수는 지춘란이 “박종근과 남도부의 관계는 동지적이었고, 서로 논쟁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남도부는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군사학을 책임지고 가르치다가 당 지시로 내려왔다. 박종근은 전투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결합을 원했고, 합의한 것 같았다. 당과 군사 전투는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었다. 박종근은 인상이 좋았고, 원만하고 현실적이며 똑똑했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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