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관계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서울에서 예정된 러시아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이 돌연 취소되었다.
자하로바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여겨지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두 차례 수상한 세계 정상급 무용수다. 자하로바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주역 무용수들과 4월 17일과 19∼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모댄스(Modance)’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한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반발 이후 공연이 취소되었다.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3월 4일 “침략 국가의 공연자들을 보여주는 것은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하는 것과 같다”라며 공연에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이에 한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3월 6일 “서구에서는 러시아를 고립시키겠다는 헛된 시도 속에서 러시아 문화를 ‘취소’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라며 “한국 국민에게서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을 접할 권리를 빼앗으려 하고, 자신의 의제를 강요하고 순전히 문화적인 행사를 정치화하려는 시도는 한국 국민 사이에서 이해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연은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자하로바는 이와 관련해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주최자, 표를 구매한 관객, 우리에게도 모든 게 무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심경을 전했다. 그러면서 “공연이 주최 측이 아닌 (한국) 정부 차원, 즉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취소된 것이라고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러시아 대사관은 15일 논평을 통해 “한국 주재 여러 제3국 외교 대표들이 러시아와의 문화교류를 중단하라는 부적절한 요구와 함께 예정된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을 폄하하기 위해 펼치는 비열한 캠페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많은 서방 국가에 만연해 있는 정치화된 반계몽주의가 현대 세계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특히 “국가와 민족 간 상호이해와 친선 관계를 강화하는 문화예술 분야의 협력이 정치적 게임의 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에 러시아 학자들이 참여할 수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지질과학연맹(IUGS)은 오는 8월 말 한국 부산에서 ‘제37차 세계지질과학총회’(37차 총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러시아 학자들도 초청받아 이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 학자들은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 소속으로 바꾸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현재 국제지질과학연맹 회장은 영국인 존 루덴이고, 학회 공동회장 중에는 우크라이나 상황과 관련해 러시아를 비난하는 성명을 낸 학자가 포함돼 있다.
루덴 회장은 지난 2022년 3월 18일 낸 성명에서 “국제지질과학연맹 활동에서 러시아 소속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중단돼야 한다”라며 “여기에는 2028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제지질학회를 개최하겠다는 제안을 철회하는 것도 포함된다”라고 주장했다.
37차 총회 조직위원회 사무국에서 활동 중인 전보연 연구원은 11일 언론 ‘스푸트니크 코리아’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유럽에서 열린 학회에서 우크라이나 분쟁 때문에 러시아 학자들의 참여를 불허한 사례가 있는데, 국제지질과학연맹도 한국 조직위에 같은 조치를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또 전 연구원은 “한국 조직위는 국제지질과학연맹의 방침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방침을 무조건 수용하는 대신 러시아 학자가 러시아의 지명·기관명이 포함되지 않은 조직 소속으로 다시 대회 등록할 경우 참석이 가능하도록 안내했다”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학자들과 러시아 대사관은 이에 항의하고 있다.
아르템 오가노프 박사는 이와 관련해 7일 자신의 텔레그램 계정에 “몇 달 전 나는 37차 총회에서 강연해달라고 초청받았다. 그런데 이틀 전(3일) 주최 측으로부터 러시아 소속을 삭제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굴욕감을 느껴 요구를 거부했다. 과학이 차별의 도구로 변질해선 안 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가노프 박사는 한국 조직위에 보낸 답장을 공개했다.
오가노프 박사는 답장에서 “러시아 과학자에 대한 한국 조직위의 차별에 경악하고, 충격을 받고, 실망했다”라며 “이런 차별은 과학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며 귀하가 주최하는 국제지질학회의 국제적 위상에도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계속해 “일부 사람들은 미디어와 정치인에 의해 유발된 외국인 혐오증과 히스테리에 취약할 수 있지만 지식인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라며 “과학, 국제 행사,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에서 차별이 용납돼선 안 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주길 바란다”라고 요구했다.
오가노프 박사는 추신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를 여러 번 방문하면서 환대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으로부터도 당연히 환대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라고 남겼다.
러시아 대사관은 11일 스푸트니크 코리아에 보낸 논평에서 “한국 조직위가 연맹 규칙이라는 이유를 들어 러시아 학자들의 보고서가 검토되기 위해서는 해당 학자들이 러시아로 되어 있는 본인의 소속을 다른 나라 소속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에 강한 불쾌감을 느낀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러시아 대사관은 “그 이면에는 이런 식으로 국제 관계에서의 분리선을 학술 분야까지 가져오려는 특정 국가 그룹의 정치적 이해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라면서 “우리는 과학에는 그러한 악랄한 음모가 들어설 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유엔 헌장과 세계인권선언,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철폐에 관한 국제협약, 기타 다른 여러 문서에 명시된 유엔의 기본 원칙에 “모든 국가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용인하지 않고, 그러한 차별을 조장하지 않아야 하며, 분열이 아닌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명시된 점을 강조했다.
러시아 대사관은 이에 따라 “우리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37차 총회 조직위가 이러한 원칙에 따라 모든 과학인이 평등하게 상호 존중하며 대화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요구했다.
한국과 러시아 간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러관계는 더 틀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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