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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16) 토벌대의 대공세와 고역의 장정 ①

- 산사람, 야산대, 구빨치산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5/18 [10:59]

[사람을 찾아서] (16) 토벌대의 대공세와 고역의 장정 ①

- 산사람, 야산대, 구빨치산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5/18 [10:59]

빨치산에게 겨울은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었다.

 

엄폐할 수 있는 공간은 나무와 풀이 있는 숲속뿐인데, 사방이 헐벗은 겨울만 되면 국방군과 경찰 그리고 미군은 빨치산을 잡으려고 토벌 대공세를 취했다. 

 

빨치산의 토벌은 1948년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이후부터 1955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지리산 빨치산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공식 선포된 때까지 8년 동안 이루어졌다. 

 

빨치산은 이 기간에 당을 보위하고 고난의 행군을 하며 투쟁했다.

 

야산대의 무대였던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였고, 신·구빨치산의 주 무대였던 지리산은 사면이 적에게 포위된 섬이 되었다. 어느 곳이고 4~5시간 정도면 토벌대가 출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북으로부터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장비를 지원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빨치산은 8년을 토벌대와 싸우며 신화를 남겼다.

 

지역 주민들의 지원과 지지, 혁명적 낙관성과 철저히 무장된 사상 신념이 그들을 8년 동안 버티게 한 것이다.

 

빨치산은 당과 함께 존재하고, 당과 함께 소멸하는 당의 정치군대였기에 가능했다. 

 

빨치산의 출발, 10월 인민항쟁

 

고난의 행군, 구·신빨치산 8년 기간은 크게 3시기로 구분된다.

 

1시기는 해방 이후 6.25전쟁 전까지로, 흔히 산사람, 야산대(野山隊)라 불리던 ‘구빨치산’이다. 2·3시기는 ‘신빨치산’으로 불렸다.

 

‘구빨치산’은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미군정의 체포령으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과 폭정을 피해 일종의 피신처로 입산(入山)한 사람을 시발로 본다. 

 

해방 이후 봄이면 농가의 9할 정도가 식량이 모두 바닥을 드러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25일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며 식량 위기를 강압적으로 대처했다.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은 강탈과 다를 바 없이 무자비하게 시행했다. 또한, 미군정은 식량 배급제라는 민중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다.

 

10월 인민항쟁의 도화선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9월 24일 총파업이었다. 특히 전날 23일 부산지구 철도 노동자들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철도 노동자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그리고 안전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 노동조건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식량 배급 또한 너무 열악했다.

 

전평 지도하에 전국적으로 벌인 총파업에 25만 천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당시 이남의 노동자 대부분이었다.

 

마침내 미군정의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켜켜이 쌓인 농민들의 분노가 10월 인민항쟁으로 폭발했다. 경북 22개 군 가운데 대부분 지역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1949년 발간된 『조선중앙연감』을 바탕으로 정해구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 시위와 봉기에 참여한 연인원은 77만 3천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 8천 명의 24%에 달했다.

 

그러나 약 3개월 동안 계속된 10월 인민항쟁은 미군정의 가혹한 탄압에 수많은 민중이 학살당하며 끝나고 말았다. 미군과 경찰, 국방경비대 그리고 정치 깡패들의 진압 작전으로 1,500여 명의 민중이 학살당하고 2만 6천여 명이 심한 상처를 입었다.

 

1948년 제주 4.3항쟁은 본격적 무장투쟁 조직인 야산대를 구축했다. 

 

본격적 무장투쟁 조직인 야산대에 대한 토벌대의 삼광삼진 학살

 

제주 4.3항쟁은 미군정의 한반도 점령 야욕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이승만은 유엔에 이남을 통치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승만은 “제주 놈들을 모조리 죽이시오”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고 살인마적 망언을 했다. 

 

4.3항쟁은 5.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났지만, 원인은 1947년 제주도 삼일절 기념 시위 이후 도민이 당한 억압과 수탈 등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배경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에서 제주도가 평화롭게 잘 통치된 곳으로 설명했다. 

 

“1948년 초까지 제주도에서 실질적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한 것은 좌익 인민위원회였다. 1945년 8월에 처음 출현한 인민위원회는 미군 점령기(1945~1948)에도 지속되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에 어떤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제주도를 아예 무시하기로 했다. (중략) 이들은 북한과 의미 있는 유대가 전혀 없었고, 본토의 남로당과도 거의 연계가 없었다. 제주도는 1945~1947년 동안 평화롭게 잘 통치되어 본토와는 대비되었다.”

 

또한, 그는 같은 책에서 제주 4.3의 원인을 경찰과 우파 청년단체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권좌에 올라 관료들을 제압하고 반란을 외부의 공산주의 선동가들 탓으로 돌리기 전까지는, 미군정의 한국인들은 반란의 원인이 제주 인민위원회의 오랜 지배와 뒤이은 경찰과 우파 청년단체의 테러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 장군은 1947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의회 의원단에 제주도는 ‘인민위원회가 코민테른의 큰 영향 없이 평화롭게 통제하는 진정한 자치지역’이라고 말했다. 그 직후 미군정 조사단은 제주도 ‘주민의 대략 2/3’가 자신들이 보기에는 ‘온건한 좌파’라고 추정했다.”

 

이승만과 국방군, 경찰 그리고 미군은 야산대를 ‘사냥’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로 여기며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잔악무도한 작전으로 살육했다.

 

제주 4.3항쟁 희생자의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당시 제주도 도민이 30여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3만 명이라고 해도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8만 명 희생설’도 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었다고 하니 제주도민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미군정 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들의 토벌을 ‘레드 헌터(Red hunter, 빨갱이 사냥꾼)’로 명명했다. 

 

특히 무장 경찰관과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 등 악명높은 반동적 테러 집단이 저지른 ‘삼광삼진(三光三盡) 작전’ 만행은 너무 끔찍했다. 이것은 왜놈들이 독립군을 잡을 때 쓰는 방법으로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앴던 작전을 도민에 무차별 감행(敢行)하여 집단 학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사냥’이었다.

 

유격 투쟁을 위해 입산하는 봉기군에 대한 토벌대의 대학살 만행

 

10월 중순 경 미군정장관 윌리엄 딘(W. Dean)은 제주도 진압군으로 여수 주둔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14연대는 육군사령부로부터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14연대 내의 사병들을 갈등과 고민 속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군인들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제주 항쟁의 ‘진압군’으로 가는 대신 여수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여순항쟁은 10월 19일 지창수 상사 등 핵심 장병 40여 명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참여 장병이 급속도로 3천여 명에 달하면서 ‘저 혐오스런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위해 궐기하자!’, ‘우리는 남북통일을 위해 해방군으로 행동하자!’ 등의 구호를 내걸고 여수 시내를 행진했다. 다음날 20일 3만여 명의 여수 민중들이 참가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고 인민의용군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송광성의 『미군점령 4년사: 우리나라의 자주·민주·통일과 미국』(한울, 1995)에 나오는 봉기군 성명서이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총궐기했다.”

 

그리고 같은 책에 있는 살포한 삐라(전단) 내용이다.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 반동적 이승만 종속 정권 타도 투쟁, 이승만 정권의 모든 법령 무효 선포, 친일파 경찰과 민족 반역자 처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봉기군은 21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했다.

 

국방군은 순천 지방 탈환에 이어 24일 여수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여수는 27일 탈환했다. 이후 군인과 경찰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봉기군에 가담했던 사람의 선별 작업 방식은 마구잡이식이었다.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가져다 신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청년이 학생복을 입은 죄로,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죄로, 국방색 러닝셔츠를 입은 죄로 살해되었다.” (반충남, 「여순반란사건 인민재판은 없었다」, 『월간 말』, 1998년 11월호)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김종원 대위의 잔인한 학살에 대해 지적했다.

 

“독이 오른 김종원은 아무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 자리 잡은 부대로 돌아와 붙잡혀 온 청년들을 보고 ‘이놈들에게 칼 시험이나 해 보겠다’며 들고 다니던 일본도를 빼 들고 한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청년이 중상을 입고도 피를 흘리며 다른 청년들 뒤로 몸을 피하자, 김종원은 계속 칼을 휘둘러 7명의 젊은이를 모두 죽였다. 희대의 즉결 참수(斬首)였던 것이다.” 

 

강준만은 같은 책에서 미국의 여순사건 (진압) 지원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고문단장 준장 로버츠는 진압군 측에 무기, 탄약, 휘발유, 식량 등을 무제한 공급하였다. 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였던 대위 짐 하우스만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미 국방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미국 측은 여순사건의 진압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군의 작전 능력과 순발력을 과시한 계기’가 되었고 ‘(경찰 보조 병력으로 산돼지몰이나 하던) 한국군 현대화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대학살 속에서 김지회가 이끄는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지리산은 ‘구빨치산’의 무대가 되었다.

 

6.25전쟁 발발과 ‘신빨치산’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신빨치산’이 편성된다.

 

‘신빨치산’은 2·3시기로, 2시기는 6.25전쟁 기간으로 제2전선의 역할을 맡았다. 

 

제2전선으로의 유격전 방향 전환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른바 9.28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시작된다. 장기 항전 유격전은 1953년 7월 27일 정전까지 유지됐다. 이때가 국방군과 경찰 그리고 미군의 대토벌로 희생이 가장 컸다.

 

빨치산의 게릴라 전술에 번번이 당하던 군경은 은거한 빨치산을 격파하기 위해 적이 사용할 모든 물자와 식량을 없애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사용했다. 지나간 자리는 모두 휩쓸고 초토화해 버리는 청야 전술로, 빨치산뿐만 아니라 지리산 지역의 주민, 민간인까지 포함해 대량 학살이 이어졌다.

 

3시기는 1953년 정전 이후부터 1955년 5월 23일까지로 토벌대의 마지막 공세와 지하활동을 위해 나오다가 거의 희생되거나 체포됐다.

 

지춘란은 2시기에 빨치산에 배속됐다. 1951년 2월 15일경 횡성에서 경북도당위원장이자 제3유격지대 사령관인 박종근 부대에서 간호 요원으로 활동하다, 뒤에 일월산에서 제3지대장 남도부를 따라 남하한다. 그리고 1953년 7월 정전 이후 체포될 때까지 3시기를 남도부와 함께한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해냄, 2016) 3부 제7권 21장(구빨치 그리고 신빨치)에서 구빨치산과 신빨치산을 자세히 소개했다. 

 

“‘구빨치’는 전쟁 전부터 야산 투쟁을 전개해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구분 짓는 뜻을 포함해 일상어로 쓰이고 있었다. 그 말은 ‘구빨치산’을 줄인 것이었고, ‘구’라는 글자는 구닥다리나 쓸모없음이란 의미는 전혀 없고 오히려 ‘혁혁한 투쟁경력’이나 ‘산 경험의 혁명 전사’라는 뜻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후퇴와 함께 새로 입산한 사람들은 자연히 ‘신빨치’일 수밖에 없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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