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아서] (17) 토벌대의 대공세와 고역의 장정 ②- 물질만능 파괴성과 인간 존중 인민성(人民性) -6.25전쟁은 매우 격렬하고 치열한 국제전이었다.
또한 매우 잔혹하고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이 저질러진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1955년 정부 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1955)의 발표에 의하면, 이남 지역 민간인 사상자(사망·학살·부상·납치·행불자) 수는 90만 968명에 이른다. 전투원보다 민간인 희생자 수가 훨씬 많았다.
이북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대략 150~2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본다. 학자들의 주장은 미 공군의 공중폭격으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이남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 공군은 전쟁 내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대량폭격과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소이탄을 다시 사용했다. 또한 미 공군의 공중폭격은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았다.
특히 전쟁 3년간 민간인에 대한 전략과 전술은 전쟁에 임하는 쌍방의 최고 사령관의 전쟁관(戰爭觀)에 따라 너무도 달랐다. 전쟁에도 물질만능 파괴성과 인간 존중 인민성(人民性) 철학이 존재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소각과 파괴를 위한 ‘초토화 정책(scorched-earth policy)’
전쟁 시기 양측의 최고 사령관과 재임 기간이다.
유엔군 사령관은 맥아더(1950년 7월~1951년 4월), 리지웨이(1951년 4월~1952년 5월), 클라크(1952년 5월~1953년 10월)였고, 주한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은 워커(1948년 7월~1950년 12월), 리지웨이(1950년 12월~1951년 4월), 밴 플리트(1951년 4월~1953년 2월), 테일러(1953년 2월~1955년 4월)였다.
조중(朝中)[북중] 연합군 사령관은 펑더화이였고, 조선인민군 사령관은 김일성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950년 12월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조선(한반도)에서 지켜야 할 작전 수칙을 예하 부대에 하달하고 지원군을 교양했다. (참조: 「지춘란(9), 6·25전쟁,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비화(飛火)하다」) 마오쩌둥의 항일전쟁과 중국 인민해방전쟁에서 축적한 경험을 보강하여, 당·군과 농민이 물과 물고기처럼 밀착해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수어(水魚)이론’이자 ‘인민전쟁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군과 미 공군의 폭격 정책은 그야말로 무자비하고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5일 오전 11시 5분, 맥아더는 미 극동공군의 주요 인사들과의 회의에서 급변하는 전황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미 공군 폭격 작전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하달했다.
김태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한국전쟁과 폭격의 트라우마」(『쟁점 한국사 현대편』, 창비, 2017)에 이 내용을 기록했다.
“이제부터 북한지역의 모든 건물과 시설, 마을(Village)은 군사·전술적 목표물로 간주합니다. 유일한 예외는 만주 국경과 한반도 내에 위치한 수력발전뿐입니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메이어(George E. Stratemeyer)는 맥아더의 정책을 소각과 파괴를 위한 ‘초토화 정책(scorched-earth policy)’이라고 명명했다.
김태우는 같은 책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초토화 정책’을 설명했다.
“맥아더는 민간인 거주 지역 내의 특정 군사시설에 대한 파괴가 아닌 ‘민간 지역 자체’에 대한 파괴를 명령했다. 도시나 농촌 지역 내 적 병력과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더 이상 폭격 작전 수행 여부의 기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 공군은 적 병력이 도시나 마을에 진입하기 전에 해당 지역을 ‘사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사전 파괴 명령은 북한 내 민간 지역이 추위를 피하고자 하는 적 병력의 휴식처이자 은신처로 활용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했다.”
또한, 미군은 지상 작전명부터 잔인하기 그지없다.
미군의 무자비한 살육 작전과 정전 모색
1950년 12월 25일,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교통사고 뒤에 후임으로 온 리지웨이는 울프하운드 작전(Operation Wolfhound, 사냥개 작전),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 Up, 포위 섬멸 작전),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 도살 작전),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 초토 작전), 돈틀리스 작전(Operation dauntless, 과감한 작전) 등 잔악무도한 살육 작전으로 일관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미군과 국방군이 현재의 진지를 사수하면서 후퇴하지 말고 가능하다면 공세를 취하는 적극 방어를 시행하도록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에게 명령했다.
이후 밴 플리트는 중국지원군의 제5차 전역 2단계(1951년 5월 16~22일까지 6일간)에서 ‘밴 플리트 포탄량(Van Fleet load)’, 즉 ‘철과 불’이라는 무지막지한 화력 공세를 펼친다. 목표 좌표를 찍어 포탄 적정량을 쏘는 것이 아니라 물량 공세를 펼쳐 철원-평강-금화를 잇는 지역을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로 만든다.
양측은 일진일퇴(一進一退)의 ‘톱질 전쟁’이 계속되는 전황(戰況)에서,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을 개성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회담은 미국과 중국이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좌초됐다. 8월 22일 북한과 중국 측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나 정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정전회담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10월 25일 재개됐다. 그리고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을 다시 획정하기 위해 한 달간 모든 전선에서 전투를 중지하기로 했다. 그러자 미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빨치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토벌 작전을 펼친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후 지리산 일대와 경상남도 진주 북서쪽 산악지역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지역인민위원회 성원들이 빨치산으로 활약하며 제2전선을 이루고 있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세상이 된 것이다.
맥아더는 2차 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전후 그리스 내전에서 게릴라 소탕전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친 밴 플리트를 불러들여 빨치산에 단호하게 대응케 한다.
미군의 토벌 작전 무기와 장비 그리고 선전전 대거 지원
미군과 밴 플리트는 빨치산 토벌 작전 계획 입안뿐만 아니라 포병, 소이탄 등 무기와 장비를 대거 지원했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미군의 지원에 대해 정리했다.
“미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60여 명의 미군 고문단을 파견했다. 선전전도 미군이 주도했다, 미군은 남원에 방송 시설을 갖추고 투항 권유 방송을 송출했으며, 투항 권유 전단을 동경에서 인쇄해 공수해 왔다. 전단은 ‘그 넓은 지리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대량으로 공중 살포했다.’ 살포된 전단은 모두 992만 장이었다.”
이태의 『남부군. 최초로 공개된 지리산 빨치산 수기』(두레, 2003)에 기록된 대량 살포된 전단과 ‘귀순증’을 빨치산들이 활용한 기록이다.
“남부군에서는, 우설(雨雪)에 견디도록 두꺼운 모조지로 된 이 삐라를 주워다가 담배 마는 데 쓰거나, 뒤지 용으로, 연락문이나 기록 용지, 불쏘시개, 여성 대원의 생리용으로까지 다양하게 이용했기 때문에 ‘귀순증’ 같은 것을 주워 갖고 다닌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 용변 후의 뒤지로 여름에는 갈잎을, 겨울에는 모두 이 삐라 조각을 썼는데 실은 빨치산 생활에서 용변 문제는 의외로 큰 골칫거리였다. (중략) 담배는 어쩌다가 농가에서 잎담배를 입수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떨어지면 마른 단풍잎을 부수어서 삐라 종이로 말아 피웠다. 이것을 ‘메불’이라고 불렀다. 옛날 1930년대에 총독부 전매국에서 만들던 ‘메불(단풍)’이라는 담배가 있었기 때문에 익살스럽게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단풍잎도 아무 데나 있지는 않기 때문에 쌈지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
1951년 11월 16일 토벌군 사령관으로 백선엽이 차출된다.
백선엽은 일본 강점기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을 학살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중위 출신이다. 간도특설대에 대해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은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 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라고 규명했다.
백선엽의 토벌 작전, 랫 킬러 작전(Operation Rat Killer, 쥐잡기)
백선엽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대토벌 작전을 벌인다.
정해구 교수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청년사, 1994)에서 백선엽을 ‘빨치산 토벌 지휘한 월남 반공 장교’로 명명했다. 또한 같은 책에서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일명 ‘랫 킬러 작전(Operation Rat Killer, 쥐잡기)’을 벌이는 백선엽의 만행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해 11월 백선엽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소탕하는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부대 이름은 ‘백(白) 야전 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 작전 명칭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 그 예하 부대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하여 서남 지구 전투사령부 등의 3개 사단과 태백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등의 4개 전투경찰 연대 및 7개 전투경찰 대대 등 전체적으로 4개 사단 규모였다. 당시 지리산에는 이현상(李鉉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단의 주력 3,800여 명이 출몰하고 있었다. 12월 초 제1기 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기 작전은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독’ 속에 갇힌 빨치산들을 토끼몰이식으로 포위, 압축함으로써 지리산 근거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19일부터 시작된 제2기 작전은 지리산 외곽의 거점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5일부터 시작된 제3기 작전은 지리산을 재차 포위, 공격함으로써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1월 말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육본 자료에 따르면 토벌 결과 5,800명이 사살되고 5,7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 측 자료에는 9천여 명이 사살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숫자는 토벌 이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지리산 3,800명, 그 주변 4천 명이라는 예상 숫자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쥐잡기 작전’은 지리산과 그 주변의 빨치산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리지웨이 작전 본부는 1952년 3월, 아직도 3천 정도의 빨치산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다고 추정했다. 예상보다 많은 빨치산들이 사살 또는 포로가 된 것은 빨치산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거나 아니면 순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 4.3항쟁 시절 부르던 은어, 누렁개(국방군)와 검은 개(경찰)가 미군의 주구(走狗)가 되어 동족을 무참히 살육한 것이다.
또한 이태는 앞의 같은 책에서 토벌군의 규모와 빨치산의 상상을 초월한 고난의 행군을 묘사했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에 걸쳐 지리산지구에 투입된 군경 합동 토벌부대는 3개 사단 4만여의 병력이었다. 그 대군이 주요 능선과 골짜기를 점령하고 들어서니 넓다는 지리산이 밤이면 토벌군의 모닥불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돼 버렸다. 능선을 따라 모닥불이 초파일의 연등 행렬처럼 점선을 그으며 늘어선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빨치산이 어디 발붙일 곳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 틈새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상상을 절(絶)하는 인내력과 지리에 밝은 덕분이다.”
빨치산의 희생을 각오한 제2전선 임무 수행
빨치산은 전쟁 시기 사선을 넘나들며 토벌대와 싸우며 ‘고역의 장정’을 하면서 희생으로 제2전선의 임무를 수행했다.
빨치산의 후방 교란은 1차 대토벌에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하여 서남 지구 전투사령부 등의 3개 사단을 전선으로부터 끌어 내리면서, 결과적으로 조중 연합군의 주 전선 강화에 기여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빨치산에 대한 심리적 압박은 4개 전투경찰 연대 및 7개 전투경찰 대대를 차출하여 치안보다 빨치산을 진압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 후방 교란 전술을 빨치산은 이루어 냈다.
그 어느 나라 빨치산 투쟁에도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근거지에다, 북으로부터의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장비를 지원받을 수 없는 엄청 열악한 조건에서 제2전선의 역할을 죽음으로 사수해 냈다. 특히 지역 주민들의 지원과 지지, 혁명적 낙관성과 철저히 무장된 사상 신념 그리고 인민성이 빨치산을 버티게 한 것이다.
전북 빨치산 출신이자 비전향 장기수인 임방규는 빨치산의 인민성을 강조해 설명했다.
“빨치산은 지휘관이나 전사들 모두가 인민의 아들, 딸들인데 인민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부대인데 어떻게 인민에게 해를 줄 것인가. 유격전에서 무엇보다 중점을 둔 것은 인민성에 대한 문제였다. 예를 들면 학습 내용은 물론 전투에서 승리하고 노획품이 많았다고 할지라도 인민성을 망각한 투쟁이나 인민에게 해를 준 전투는 총화 회의에서 잘못된 전투로 규정했다. 빨치산은 군사부대이며 정치부대이다.”(『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 상』, 백산서당, 2019)
또한 김태우는 앞의 같은 책에서, 미군이 행한 민간인 학살과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 만행에 대해 분개하며 6.25전쟁에서 미군이 취한 행위의 총체적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인들의 평화를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미군이 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했는지, 왜 북한의 도시와 농촌을 모두 불태워 버린 초토화 정책을 강행했는지, 왜 정전협상이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에 북한 곡창지대의 저수지들을 한꺼번에 파괴하여 광범한 벼농사 지역을 침수시켜야 했는지 등에 대한 분석이 한국전쟁 해석에 종합적으로 포괄될 때 비로소 전쟁의 실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지춘란은 제3지대장 남도부와 함께 전쟁 시기 토벌대의 대공세에 맞서 고역의 장정을 하며, 1953년 7월 정전 때까지 사선을 넘나들었다.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이었다고 했다. 황금수는 “미군 비행기가 돌아다니면서 휘발유를 뿌리고, 폭탄을 비처럼 떨어뜨려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다. 오직 기름 냄새로 감지해서 피해 다녔다”라고 지춘란이 증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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