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아서] (19) 회담 중에도 폭격하며, 북한을 불바다 물바다로 만드는 미국- 네이팜탄 사용과 관개용 댐 폭격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군사정전협정)을 조인한다.
무려 2년간이나 끌어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것은 군사분계선(휴전선)과 포로 송환 문제를 두고 첨예한 정치·군사적 입장 차이로 정전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처음 정전 협상은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4개월을 끌었다. 양측은 우여곡절 끝에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순간 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두고 쌍방이 2킬로미터씩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는 데 합의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1952년 7월부터 시작된 포로 교환 문제가 1년여 동안 정전을 더 지연시켰다.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자동 송환’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과 유엔군 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자유 송환(또는 자원 송환)’, 즉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자고 맞섰다.
그러면서 미국은 공군력을 이용한 소위 ‘항공 압력 전략’으로 후방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대량 폭격을 감행하는 심리전도 구사했다. 또한, 정전회담의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네이팜탄 사용 등 전쟁범죄도 불사했다.
정전회담 타결의 계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과 스탈린 소련 서기장 서거
1952년 5월 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자유 송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 (중략) 우리는 인간을 살육의 대상이나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휴전을 채택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정전회담 타결의 결정적 계기가 미국과 소련에서 발생한다.
미국에서 ‘명예로운 휴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953년 1월 20일 아이젠하워 정부가 출범한다. 그는 2월 2일 연두교서에서 전쟁의 심각한 확대를 경고했다.
소련에서는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서기장이 서거한다.
미소 양대 진영의 정치적 변화로, 정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1953년 4월 11일. 그간 협상을 가로막아 왔던 ‘부상 포로 교환협정’이 판문점에서 조인된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당시 부상 포로와 일반 포로 교환에 대해 정리했다.
“4월 11일 그간 협상을 가로막아 왔던 ‘부상 포로 교환협정’이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4월 20일과 5월 3일 사이에 유엔군은 북한군 포로 5천 194명과 중국군 포로 1천 30명을 북으로 송환하였으며, 공산군 측은 국군 포로 471명과 유엔군 포로 149명을 송환하였다. 이제 남은 건 일반 포로 교환 문제였다. 부상 포로 교환 합의 후 미군 측은 공산군 측의 제의를 절충하여 ①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4만 7천여 명의 포로를 인도·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등 5개 중립국의 관리하에 둔다, ② 인도군이 이들 포로가 남한에서 중립국 관리하에 있는 동안 감시 업무를 맡는다, ③ 약 190명의 공산 측 대표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4개월간 포로들에게 송환을 설득하도록 한다, ④ 포로 문제의 타결이 불가능할 경우 정치적 망명처를 요구하는 포로들에게는 유엔총회가 자유세계에 거처를 정하도록 주선해 준다는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주은래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즉각 송환하고,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일단 중립국인 인도 쪽에 넘겨 처리하도록 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미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6월 8일에는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강준만은 중국인민지원군이 5월 7일 ‘직접 송환되지 않은 억류 포로들을 쌍방이 동의하는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이관해 송환 문제를 처리하자’라고 제안한 내용은 빠뜨렸다.
미국이 중국 측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중국인민지원군의 하계 공세다.
중국인민지원군의 하계 공세와 일반 포로 교환 문제 합의
미군은 포로 교환 문제 회담을 하는 동안에도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검토와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강준만은 앞의 같은 책에서 정전회담의 유리한 국면 조성을 위해 미국의 핵무기 사용이 다시 검토되었다고 설명했다.
“53년 5월 13일 백악관에서 열린 제144회 국가안보회의에선 또다시 핵무기 사용이 검토되었다. 장군들이 한국에는 핵무기를 사용할 만한 전략적 목표물이 없다고 말하자, 아이젠하워는 비키니섬에서 한다던 침투용 핵무기 실험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다. 침투용 핵무기란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탄과는 달리 특정 목표물에 정확히 접근하거나 벙커나 방호벽을 뚫고 들어가 터지는 전술핵무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다시 장군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자 아이젠하워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로 그 문제를 끝냈다고 한다.”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하계 반격이 성공하자, 미군은 다시 포로 협상장에 돌아온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는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에서 당시 일반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5월 7일, 우리 측은 ‘직접 송환되지 않은 억류 포로들을 쌍방이 동의하는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이관해, 송환 문제를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군 측은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그들은 ‘북한의 전쟁포로를 남한 현지에서 석방하겠다’는 무리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중략) 아군 하계 반격이 ‘반드시 칠 곳은 치되, 세게 친다’는 방식으로 이뤄져 예상외로 크게 먹혀들자, 미군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아군의 반격으로 막판에 많은 기반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반격이 제대로 먹혀들자, 미국 측은 전쟁포로 송환 문제에 대해 신축성 있는 자세를 보였다. 마침내 우리 측이 지난 5월 7일 제시했던 방안에 동의한 것이다. 그래서 쌍방은 6월 8일 합의를 보았다. 휴전회담의 뚜렷한 진전이 가시화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정전 협상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전쟁범죄도 불사했다.
미군의 전쟁범죄, 북한을 불바다로 만든 미국의 네이팜탄
네이팜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발명된 신무기이다.
네이팜탄이란 나프텐산(Naphthenic acid)과 팔미트산(Palmitic acid)에서 딴 이름이다. 이 지방산들이 알루미늄이나 마그네슘과 반응하면 네이팜이란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진다. 네이팜은 섭씨 3,000도의 고열로 반경 30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성질이 있다. 이 성질을 악용해 폭탄으로 만들면서, 여기에 사람 몸에 닿으면 피부 안으로 깊이 침투하는 ‘인(燐)’을 첨가한다.
네이팜탄은 합성된 네이팜에 ‘인’이란 살상 능력을 더 추가한 초강력 대량 살상용 폭탄으로, 한자어로는 소이탄(燒夷彈)으로 불렸다.
원래 네이팜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세계 최대 고무 생산지인 말레이시아를 점령하자 미국이 대체 고무를 만들려다가 발견한 네이팜을 폭탄으로 만든 것이다.
1945년 3월 9일에서 10일 사이 미군은 일본 도쿄를 전략 폭격한다. 이른바 도쿄 대공습(東京大空襲)으로, 여기에 네이팜탄을 대량 투하하여 도쿄를 말 그대로 ‘불바다’로 만든다.
또한,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72년 6월 8일, 투하된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고 알몸으로 울며 달아나는 소녀의 모습을 AP통신이 보도했다. 이 처참한 ‘네이팜탄 소녀’ 사진이 세계를 경악시켰다.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 한 장의 사진이 반전 여론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전우용은 6.25전쟁에 사용된 네이팜탄으로 부상한 사람의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한국전쟁 중 한반도에는 도쿄 대공습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네이팜탄이 투하되었다. 미 극동공군이 투하한 폭탄 50만 톤 중 네이팜탄은 3만 2,357톤이었다. 네이팜탄으로 사망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상자들은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에 시달렸다. 작은 파편이 몸에 닿으면 사람들은 손으로 털다가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는데, 그러다가 대개 손과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이 잔인성 때문에, 네이팜탄은 베트남전 이후 비인도적 무기로 규정되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잡동산이 현대사 – 전우용의 근현대 박물지 3 정치·경제』, 돌베개, 2023.)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2001)에서 신무기 네이팜탄 사용과 댐 파괴를 미군의 가장 악랄한 6.25전쟁 행위로 기록했다.
“원자탄만은 삼갔지만, 미국은 또 다른 신무기인 네이팜탄을 공중에서 쏟아부어 불바다를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북한의 계곡들을 물바다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댐들을 파괴했다. 이는 한국전쟁의 가장 악랄한 측면으로, 이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자체가 곤혹스럽다. 바로 이 때문에 200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미군의 전쟁범죄, 관개(灌漑)용 댐 폭격으로 북한을 물바다로 만드는 미국
미군은 군사분계선을 더 북쪽으로 밀어붙이고 정전회담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는 관개용 댐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다.
강준만은 같은 책에서, 댐 폭격의 목적과 폭격 아이디어 제공자에 관해 이야기했다.
“미군의 댐 폭격은 다목적이었다. 북한 전역에서 일어난 홍수 사태로 군사시설과 비축물자가 파괴되었고, 인명에 타격을 주는 한편 쌀을 파괴해 심리적 공황 상태까지 이르게 했으니 대단히 성공적인 작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파괴는 뉘른베르크의 나치 전범재판에서 전쟁범죄로 단죄된 것과 같은 종류의 행위였다. 아무리 전쟁이라 하더라도 미군은 결코 해선 안 될 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미국 선교사들이 52년 가을에 이런 가공할 파괴 행위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도쿄 맥아더 사령부 정보처 특수계획과장으로서 대표적인 호전 강경파였던 필립 코르소의 증언을 앞의 같은 책에 인용했다.
“한번은 우리가 관찰하던 중공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옹진반도 전체에서 그런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선교사들 몇 명과 접촉해 중공군이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벼를 수확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논에 물을 대주는 저수지를 왜 폭격하지 않느냐, 그러면 내년에 쌀이 떨어질 텐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해군에 전화를 걸어 어뢰나 미사일을 쏴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거절했다. 그래서 저수지를 건설한 일본 기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연신관을 장착한 폭탄을 투하하고 비행기가 상승하면 폭탄이 지표면을 균열시킬 것이다. 나머지는 댐 속의 물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저수지들을 몽땅 다 파괴했더니 북한 방송들이 모두 미친 듯이 야단들이었다. 나중에 베트남전에서 그 방법을 쓰라고 공군에게 이야기했지만, 또다시 정책이 가로막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의 댐 폭격의 잔학성에 대해 앞의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댐 폭파는 유엔사령부에 적의 통신선과 공급선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제1차적 생존, 즉 쌀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다. 서구인들은 식량을 잃는 것이 아시아인에게 갖는 소름 끼치는 의미, 즉 기아와 서서히 덮쳐오는 죽음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지춘란 간호장의 부군 황금수는 다른 경우이지만 물의 파괴성과 무서움 그리고 공포에 대해 증언했다.
“지춘란이 빨치산을 하면서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물이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사방에서 계곡으로 몰려오는 집채만 한 물이 범람해, 한번은 동료 군의관이 급류에 익사했다. 장마 뒤 물이 깊어지고 물살이 빨라져서 쓸려간 것이다. 주검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지춘란은 물을 겁냈다. 결혼 후 여름에 더워서 한강에 아들 원(元)이랑 놀러 가면 발목 부위 이상은 물에 들어가질 않았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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