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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원한 진보정치·통일운동의 고문, 조영건 교수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7/11 [13:01]

[기고] 영원한 진보정치·통일운동의 고문, 조영건 교수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7/11 [13:01]

4.19혁명의 주역으로, 당시 총상을 입은 중학생을 시위대와 함께 부축하며 ‘환자 위급’, ‘환자 후송’이라고 외치는 조영건 교수(사진)가 10일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4세.

 

[제공: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고인은 1940년 옛 영산현, 현재의 창녕군 도천면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의 혜택으로 첫 한글 교육을 받은 해방 세대. 한글 세대, 민족 세대였다.

 

부산의 경남고를 졸업하고 법이나 정치, 경제, 사회과학 등의 분야에서 자신의 의지를 펼칠 수 있다고 해서 별 저항 없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1958년 입학하였다고 한다.

 

조영건 교수하면 ‘4.19혁명의 주역’으로, ‘노동·통일·진보 실천학자’로, 그리고 진보정당 건설과 탄압에 맞서 한길을 걸어온 ‘통합진보당 엄호 지지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죽산 조봉암의 대통령 선거 유세에 따라다니며 평화통일·민중해방·진보 지향의 가치를 배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가족은 마산으로 이사를 한다.

 

조영건 교수는 교육자 집안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다. 초등학교 시절을 마산에서 보내고 부산 경남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고인이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부산은 6.25전쟁과 함께 매우 급박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고인은 1952년 이승만 정권의 ‘발췌개헌 사건’으로 국회의원이 끌려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같은 해 서구 충무동에서 개최된 ‘6.25 멸공 통일의 날’ 기념 대회에서 연설 중인 이승만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도 직접 보았다고 한다.

 

1952년 이른바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이때 고인의 집안은 죽산 조봉암 선생과 같은 창녕 조씨 집안으로, 문중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 유세장을 고인은 따라다닌다.

 

고인은 마산에서 부산으로 기차 통학을 하였는데, 건강과 성적 문제로 집안 어른이 걱정해 집이 있는 마산중학교로 전학 간다. 

 

1956년 다시 부산으로 와 경남고에 진학한다. 그 당시 부산 한복판, 하야리아 미군 부대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있었다. 고인은 매일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하라’는 멸공 통일 관제 데모에 동원되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이후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죽산 조봉암이 진보당을 결성하여 후보로 나오자, 고인은 선거 유세를 쫓아다니며 정치의식을 발전시켜 간다. 이때 진보당의 슬로건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반대하는 ‘평화통일’과 대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 철폐였다.

 

지금 윤석열 정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대로 4년을 더 살 수 없다는 것이 대선의 슬로건이었다.

 

고인은 이때부터 평화통일·민중해방·진보 지향의 가치를 가슴에 안고 살게 되었다고 했다.

 

4.19혁명의 한복판에 뛰어들다

 

격동의 해 1960년 3월 고인은 마산 집에 있었는데 집이 마산시청과 무학초등학교 사이의 500m 간선도로의 길갓집인 관계로 마산 3.15부정선거의 역사적 현장을 보게 된다.

 

선거 당일 오후 7시 투·개표장인 시청의 불을 꺼버리자, 민중이 불을 켜라고 항의하는 현장에 고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은 시청 정문에 대치한 민중에게 무자비하게 정면 조준 발포한다. 

 

이것이 3.15 1차 ‘마산항쟁’이다. 경찰 발포로 8명이 희생됐고 80여 명이 다쳤으며 200여 명이 연행된다. 

 

4월 11일 아침, 3월 15일 시위 때 눈에 최루탄을 맞고 죽은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학생과 민중은 자연스럽게 곪을 대로 곪은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는 2차 ‘마산항쟁’을 일으켰다.

 

고인은 2차례의 ‘마산항쟁’을 지켜보면서 4월 개학을 맞아 상경한다.

 

4월 19일 아침, 조간신문 1면은 18일 이승만 정부가 동원한 정치 깡패들의 ‘고려대 시위대 습격’ 머리기사로 도배되었다. 이를 본 학생과 민중은 경악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4월 19일 서울 도심 태평로 광화문 시청 앞 광장 일대는 어깨동무한 학생과 민중의 시위로 물결쳤다. 시위대열이 이승만 독재정권의 심장부 경무대로 진출하자 경찰은 소방차의 물을 뿌리며 일렬횡대로 발포했다. 시위대는 소방차에 올라타 후진을 하며 저항하였지만, 경찰의 발포로 무참히 쓰러진다.

 

고인은 경찰을 피해 경무대 정문 옆집 담장을 넘어 당시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인 씨의 집을 통과한다. 그런데 경찰의 총에 맞은 중학생이 쓰러져 있었다. 고인은 다친 중학생을 시위대와 함께 부축하며 ‘환자 위급’, ‘환자 후송’이라고 외치며 경찰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이때 외신이 찍은 사진의 주인공이 조영건 교수이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희생자 수는 사망자가 115명 그리고 부상자가 727명에 달하였다. 

 

당일이 화요일이었기에 1905년 러시아혁명처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진보적 노동, 통일 학자의 길을 가다

 

고인은 1964년 한국노총에서 ‘노동운동사’ 편찬위원을 모집하는 광고에 응시해 ‘노동운동사’ 편찬위원회 일과 이후 한국노총이 신설한 기획실 일도 맡게 된다. 이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가 협찬한 아시아문제연구소 학술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도 한다. 

 

고인은 해방 이후 노동운동사를 썼다. 해방 이전 노동운동사는 역사학자인 강동진 건국대 교수가 집필했다. 그때 강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더 공부하라’는 조언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는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는 경제사로 받았다.

 

1971년 건국대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1975년 청주대학에 조교수로 진보적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도중에 ‘운동권’과 교류하다가 남산 중앙정보부에 두 번이나 연행됐다.

 

고인은 1979년에 고향인 경남대학교 경제사학 교수로 초빙된다. 

 

원희복의 인물 탐구 「4·19혁명 ‘산증인’ 조영건」이라는 제목의 2019년 4월 20일 자 경향신문 기사이다.

 

“경남대 교수에 가자마자 마주친 것이 바로 10월 부마항쟁이었다. 그는 경찰에 끌려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다 결국 시위대에 동참했다. 그 덕분에 그는 제자들에 의해 부마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에 추대됐다. 마산은 그가, 부산은 송기인 신부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노무현·문재인 변호사다. 특히 문 변호사는 고교 13년 후배로 각별히 지냈다.

 

그는 경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1982년 노동복지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를 포함해 전국에서 두 번째, 지방에 설립한 첫 노동문제연구소였다. 상경대 학장도 지냈고, 영국 런던대 연구교수, 러시아 하바롭스크 사범대 강의 교수, 상하이 푸단대 초빙교수 등을 지내며 연구와 강의에 매진했다.”

 

또한, 학계에서 노동문제에 실천적 의지를 가진 전공 연구자 교수들과 ‘노동경제학회’를 창설하였고, 이후 노동시장이론 노사협조주의를 반대하는 학자들의 모임 ‘임노동학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고인은 1992년 경남대학교의 자매대학인 하바롭스크 사범대학에 동방학부가 생겨 한국학 강의 교수로 초청되어 한 학기를 강의했다. 또 1994년 블라디보스토크 국립대학에 고려합섬 투자로 개설된 한국학대학에 초빙되어 한국경제론 강의도 담당했다.

 

2000년에는 상해 푸단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받고, 같은 해 장춘 길림대학 조선문제연구소 초빙교수로 동북 중국의 문제를 연구 토론하기도 했다.

 

[제공: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진보정당 건설에 몸을 던지다

 

고인은 1988년 6월 18일 사월혁명연구소 창립 후 연구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96년 5대 연구소장을 맡는다.

 

또한, 고인은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조직된 통일연대의 학술연구특별위원장을 맡으면서 상임대표자회의에 학자로서 결합했다. 2005년에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가 결성되자 남측위원회 학술본부 상임위원장으로도 활동한다. 그리고 6.15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의장도 맡게 된다.

 

그러나 고인은 진보 학자, 통일운동가로는 양이 차지 않았다.

 

알렉스 칼리니코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지적 개입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단지 세계를 관찰만 할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그러했듯이 자신을 노동자 계급의 삶과 투쟁 속에서 혁명 정당 건설이라는 실천적 과제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1997년부터 진보정당 창당 작업이 속도를 내자, 고인은 자주‧민주‧통일 4월혁명정신을 안고 창당준비위원으로 결합하여 당명제정위원장으로 활동한다. 이후 진보정치 당 기관지 위원장과 이후 재단법인으로 새로 정비한 새세상연구소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한다.

 

또한, 2012년 소위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과 2013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사건’에 구명 운동과 당을 엄호 지지하는 데 몸을 던진다.

 

이후 고인은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으로 생을 다할 때까지 노동자와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2012년 『사월혁명회보』 회원 탐방에 실린 칠순을 넘긴 조영건 교수의 소회(所懷)이다.

 

“후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해도 좋을 때가 되었다. 

후배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진보정치가 요구하는 고문 그리고 통일운동이 청하는 고문 외에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과 같은 반열로 중국에서 추앙받던 명장 악비가 남긴 환아하산(還我河山)이라는 글귀가 점점 나에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식민과 분단의 고난을 넘어 역사는 한 세기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새 시대로 접어든다.

 

이제 돌이켜보면 시대를 굴절없이 산 4.19 우리 세대 벗들과 같이 형극도 보람도 같이 했지만 해방 국면에서 깨어 앞선 동료들은 다 죽고 다 폐인이 되었는데 한평생을 살아가려면 교수 자리를 걸쳐 대학에라도 몸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은사 교수의 권고로 학위도 하고 교수도 하고 살았으니 나는 고생한 동 세대 동지들과 벗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가 부모에게의 효도에 앞서 처자식에의 의무에 앞서 내 일신의 타산에 앞서 내 나름대로의 가진 모든 것 의지도 정열도 지식도 돈도 시간도 모두를 민족과 민중에게 바치고자 나를 재촉했다.

 

나는 옆도 뒤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려와 일흔에 이른 것이다.”(출처: 『사월혁명회보』 제104호, 2012년 4월)

 

‘자주 민주 통일의 한 생 고 조영건 교수 노동시민사회장’

 

빈소: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호실

입관: 7월 11일 오후 1시 30분

발인: 7월 12일 오전 6시 30분

화장: 7월 12일 오전 9시 30분,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

장지: 마석 모란공원 

추모의 밤: 7월 11일 오후 7시, 장례식장

 

조영건 교수의 장례는 ‘자주 민주 통일의 한 생 고 조영건 교수 노동시민사회장 장례위원회’가 주관한다.

 

조문은 장례 기간 중 오후 10시 30분까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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