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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20) 정전협정 체결과 남도부 부대 하산 결정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7/15 [08:52]

[사람을 찾아서] (20) 정전협정 체결과 남도부 부대 하산 결정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7/15 [08:52]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중장과 북중연합군 남일은 세 통의 정전협정서와 부속 협정서에 각각 서명했다.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 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 조항에 기재된 정전 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 데 각자 공동 호상 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The undersigned,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in the interest of stopping the Korean conflict, with its great toil of suffering and bloodshed on both sides, and with the objective of establishing an armistice which will insure a complete cessation of hostilities and of all acts of armed force in Korea until a final peaceful settlement is achieved, do individually, collectively, and mutually agree to accept and to be bound and governed by the conditions and terms of armistice set forth in the following articles and paragraphs, which said conditions and terms are intended to be purely military in character and to pertain solely to the belligerents in Korea.” (출처: 나무위키)

 

그리고 ‘armistice’를 ‘정전’이라고 번역했다. 

 

이 협정을 ‘정전협정’이라고 부른 이유는 쌍방 간의 공식적인 합의로, 평화에 관해 협상하기 위해 특정 시간 동안 전투를 ‘중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전협정’ 조인은 12분 만에 끝났지만, 본회의 159차 포함, 모두 765차례의 회담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역사상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최초로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미 육군 사령관

 

‘정전협정’ 조인 즉시 쌍방은 전투 중지 명령을 하달하였고 양측의 대치 전선은 바로 군사분계선이 됐다. 

 

“정전협정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1.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킬로미터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고 이를 완충지대로 삼아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

 

군사분계선의 총길이는 248킬로미터, 그 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킬로미터 지점까지의 완충지대를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Demilitarized Zone, DMZ)’로 지정했다. 비무장지대의 면적은 3억 평으로 여의도의 약 120배 규모나 된다.

 

비무장지대 경계선은 처음에는 쌍방지역 경계선에 따라 적당한 표지물을 세웠으나, 이후 철조망이 처지고 철조망은 차츰 더 튼튼한 철책으로 교체된다.

 

38선은 지도 위의 선이었으나, 군사분계선은 지표(地表) 위의 선이었다.

 

그리고 정전을 감시할 중립국 감시위원회(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NNSC)를 설립하였다.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37. 중립국 감시위원회는 4명의 고급 장교로 구성하되 그중 2명은 유엔군 사령관이 지명한 중립국, 즉 스웨덴 및 스위스가 이를 임명하며 나머지 2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공동으로 임명한 중립국, 즉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가 이를 임명한다. 본 정전협정에서 쓴 중립국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그 전투부대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를 말한다.”

 

유엔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정전협정에 최종적으로 서명한 마크 클라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역사상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조인한 최초의 미 육군 사령관이었다. (중략) 나는 실망이 너무 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라고 협정 조인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정전 서명과 효력 시점을 악용하여 미군은 마지막까지 무차별 폭격하다

 

쌍방의 적대행위의 완전 정지는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12시간 후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오후 10시에 마침내 종료됐다.

 

그러나 미군은 효력이 발생하는 오후 10시까지 전투 행위를 계속했다. 서명과 효력 시점을 악용하여, 특히 미 공군은 마지막까지 폭격했다. 

 

강정구 교수는 「미국과 한국전쟁」(『역사비평 제23호』, 역사비평사, 1993.5.)에서 미군의 치졸한 정전 보복 행위를 기록했다. 

 

“군사적 좌절감에 빠진 미국은 정전협정 서명 후 발효까지의 12시간 동안에 이러한 패배감과 분노를 타락하고 야만스런 보복 행위로 표출시켰다. 정전 발표 30분 직전에 중폭격기 편대가 평양시를 마지막으로 강타했다. 또 정전 서명 1시간 20분 직후 미국 세이버 제트기 4대가 중국 영토 100킬로미터 내에 있는 민간 비행장에 침투해 소련 민간 항공기를 폭격해 15명의 승객과 6명의 승무원을 살상했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종전 시간 바로 전까지 계속된 원산폭격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의 기록을 재인용했다.

 

“공식 미 해군사에 따르면, 원산폭격은 ‘현대 미 해군 역사상 최장의 것’이었다. 그 공격은 861일간이나 계속되었고, 종전 시간인 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휴전 1분 전에야 끝이 났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산은 그때 ‘완전 폐허가 되었으며 멀쩡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 버렸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미 해군 소장 스미스의 증언도 수록했다.

 

“미 함정은 원산을 밤낮없이 폭격했다. (중략)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루어진 함포 공격이나 공중 폭격으로는 역사상 최장 시간일 것이다. (중략)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전이 이루어지고 정전 체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모든 전투 행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정전(停戰) 대신 휴전(休戰)이라는 용어를 쓰는 한국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정전’이라는 말 대신에 ‘휴전’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박태균 교수는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에서 정전과 휴전의 차이에 관해 설명한다.

 

“‘정전(停戰)’은 말 그대로 전쟁을 정지한다는 뜻이다.

‘휴전(休戰)’은 전쟁을 쉰다는 뜻이다.

따라서 휴전이 더 호전적인 용어다.

끝난 게 아니라 쉬고 있는 것이니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휴전’이라는 말이 굳어졌으며, ‘휴전선’, ‘휴전협정’이라 부른다.

하지만 당시의 정확한 용어는 ‘정전’이었다.

지금도 판문점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회담을 ‘군사정전위원회’라 하지 ‘군사휴전위원회’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국은 ‘정전’을 ‘휴전’이라 부르면서, 전쟁을 쉬고 있을 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1957년 미 국무부와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이 정전협정 13조 (ㄹ)항을 위반했다고 조항이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958년에는 주한미군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을 배치했다. 주한미군의 핵미사일은 1991년 남북한 사이의 비핵화선언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한국에 남아 있었다.

 

“정전협정 13조 (ㄹ)항

 

한국 국경 외로부터 증강하는 작전 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의 반입을 정지한다. 단 정전 기간에 파괴, 파손, 손모 또는 소모된 작전 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은 같은 성능과 같은 유형의 물건을 1대 1로 교환하는 기초 위에서 교체할 수 있다.”

 

또한, 정전협정이 이루어졌지만 남북한에는 외국군이 계속 주둔하였다. 

 

1958년 북한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철수하지만, 한국은 미군이 계속 주둔했다. 근거는 한미 간의 상호방위조약이었다.

 

이처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협정은 완전하지 못했다. 

 

서해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 Northern Limit Line, NLL)은 바다 위의 정전 뇌관이었다.

 

서해 북방한계선 NLL, 바다 위의 정전 뇌관

 

정전 당시 공군과 해군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유엔군 측은 해양 경계선을 합의하지 않고, 정전협정 직후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일방적으로 해양 경계선을 북한에 통보했다. 

 

해양 경계선은 서해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다섯 개 섬의 북단과 황해도 옹진반도 사이에 그어졌다. 소위 이 선이 서해의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 Northern Limit Line, NLL) 이다.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13. ㉡ (중략) 상기한 연해 도서라는 용어는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에 비록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 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섬들을 말하는 것이다. 단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및 우도의 유엔군 사령관의 군사 통제하에 남겨두는 도서군을 제외한 기타 모든 섬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 인민지원군의 사령원 군사 통제하에 둔다. 한국 서해안의 상기 경계선 이남에 있는 모든 섬들은 유엔군 사령관의 군사 통제하에 남겨둔다.”

 

실제 말이 북방한계선일 뿐 본질은 남방한계선이다. 

 

리영희 교수는 애초 북방한계선은 유엔사가 50년대 북한 해안에 대한 군사적 침투 등 서해에서 한국 해군의 군사행동을 방지하려고 그어 놓은 것이었다고 했다. 이는 정전협정의 군사분계선이 아니며, 그 남쪽이 한국 영해가 아님은 물론이다. 

 

한국 군사력의 행동 범위를 통제하려던 북방한계선은 북한 해군과 선박의 남방 저지선이 됐다. 

 

1953년부터 현재까지 정전협정 위반 사건과 남북 간의 교전이 발생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1999년, 2002년, 2009년 3번의 서해교전이다.

 

9.19군사합의가 백지화되면서 NLL 남북으로 설치된 완충지역이 사라지고 양측의 포사격 훈련과 군사력 집중이 벌어지고 있다. 

 

당 중앙정치위원회 결정 111호에 의해 남도부 부대 하산 결정

 

남도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 이후 조선노동당 ‘당 중앙정치위원회 결정 111호’ 방침대로 유격전을 중단하고, 지하당 활동에 돌입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온다.

 

박태균 교수 앞의 책 “111호 결정(1952년 중반)” 발췌 내용이다.

 

“각 지구당이 중앙과의 연락 사업을 진행시키지 못해 중앙당의 결정이 제때 전달되지 못했다. 무장투쟁에만 편중하고 당 조직사업에 소홀했다. 각 유격부대가 대부대로 집결하여 참호를 파고 수일간에 걸친 정규적 진지전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경찰과 헌병 조직이 널리 분포된 불리한 조건에서 당과 유격대에 불리한 결과를 준다.

노동당은 이러한 평가에 따라 유격투쟁, 지하 당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했다.

유격투쟁 : 유격대는 인민과 연결되고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불필요한 모험적 전투는 피하되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 되고 위축되어 자진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지하 당 사업 : 각급 당 지도부는 산으로 올라가지 말고 중요 산업 부분과 노동자, 농민, 군부 속에 당 조직을 강화하고 그 토대 위에서 지구당 지도부를 도시로 진출시키도록 한다.”

 

현재 남도부 부대 유일한 생존자인 구연철이 증언한 하산 배경이다.

 

“휴전 두 달 전인 5월 초순에 무전기가 고장 나 중앙당이나 인민군 사령부와 연락이 두절되어 있던 제4지구당은 민간 정보를 통해 휴전 소식을 접했다.

남도부는 조직적인 하산을 서두르는 한편으로 정규전이 끝났으니 빨치산과 토벌대의 싸움도 휴전하자는 제안이 든 유인물을 제작해 울산과 청도 일대에 뿌렸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고, 토벌대는 그대로 밀고 올라왔다.

남도부는 인명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전투를 자제하고 하산을 서둘렀다.” (『신불산: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 산지니, 2011.)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는 하산에 대해 “무전기는 있었지만, 고장이 나서 불통이었다. 조선인민군 사령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정전 소식을 듣고 남도부가 당 방침에 따라 하산 결정하였다”라고 증언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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