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의 국제적 지위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이 정점에 있었던 일극 체제가 무너지며 미국의 세계 패권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흐름을 뒤집어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동구권이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자본이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밀려 들어갑니다. 마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 우리 우량기업들이 외국 자본에 헐값으로 넘어간 것과 비슷한 수탈이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자본주의권도 경제 위기로 어려울 때였는데 마침 동구권 붕괴로 활로가 열린 것입니다.
한국도 여기에 편승해 많은 이득을 챙겼습니다. 당시 잘 나갔던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표방하며 동유럽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지금도 동유럽에 가면 대우 가전제품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도 이와 비슷한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을 무너뜨리고 수탈하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미국 경제도 살고 동맹국도 수혜를 입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3월 26일 대러 경제제재를 발표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향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2023년 11월 28일 자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보도 「미국, 러시아 경제 허리 끊는다고? 되레 살아났다」에 따르면 미국은 개전 1달 전 대러시아 제재안을 완성하고 주요 7개국(G7), 유럽연합(EU), 호주, 싱가포르, 한국, 대만 등 이른바 ‘비슷한 생각의 나라(LMN)’들과 촘촘한 차단막을 미리 짜놓았다고 합니다. 단기적으론 러시아의 전쟁 재원을 고갈시키는 동시에 반도체 등 첨단기술을 차단해 군사력을 약화하겠다는 목표였고, 장기적으론 러시아 경제의 허리를 끊어 전쟁 전보다 규모가 30~50% 쪼그라들도록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러시아 경제를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의 ‘백지상태’로 돌리겠다고 장담했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그즈음 몇 차례나 양치기 소년처럼 러시아의 침공을 예견하면서 전쟁을 학수고대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미국의 구상대로 사태가 흘러갔으면 러시아의 방대한 천연가스를 비롯해 온갖 자원과 우량 기업들이 모두 미국과 동맹국들의 손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155밀리미터 포탄을 대량 지원했던 한국에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초반에는 확실히 러시아 경제가 흔들리는 듯했습니다. 금리가 뛰고 환율이 요동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고 유럽이 차단한 천연가스를 중국과 인도로 돌리면서 오히려 경제 성장이 G7을 능가하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대러 제재를 피하고자 러시아 주변국과 브릭스가 우회 경로를 자처하면서 그들도 수익을 올렸습니다.
반면 유럽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 미국의 대러 제재에 동참한 나라들은 경제 타격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특히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전반적인 물가 인상이 일어나 서민 고통이 커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에 동조한 나라는 이익을 봤고, 미국에 동조한 나라는 손해를 봤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크라이나 전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크게 밀렸다면 많은 나라가 미국 눈치를 보며 러시아와 거리를 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크게 밀렸고 러시아가 승승장구했습니다. 이제는 미국 언론조차 우크라이나의 패배를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많은 나라가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러시아와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무척 답답할 것입니다.
미국은 전쟁 전부터 우크라이나에 엄청난 투자를 해서 무장을 시켰고 훈련도 시켰습니다. 전쟁 후에도 우크라이나에 각종 정찰 정보를 넘겨주고 작전도 짜주면서 러시아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게임 체인저’로 꼽히는 여러 무기도 제공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한국 등 미국의 요구를 받은 많은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갖다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밀리자 미국은 원인 찾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게 아마도 ‘북한 지원설’인 듯합니다.
러시아에 북한 무기가 들어간다는 주장은 2022년 9월 5일 처음 등장했습니다. 비밀 해제된 미국 정보에 러시아가 북한 포탄과 로켓 수백만 발을 구입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보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 포탄보다는 이란의 무인기가 더 쟁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 무기가 낡아서 실전에서는 도움이 안 될 거라는 분석까지 했습니다. 북한은 대러 무기 수출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다 11월이 되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나서서 정부 공식 발표로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을 제공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적지 않은 양의 포탄”이지만 “이것으로 전쟁의 방향이 바뀔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라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유엔에서 책임을 묻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기 때문에 유엔에서 책임을 물을 방법은 없습니다. 북한은 이번에도 관련 거래를 부인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북한의 러시아 무기 제공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수시로 규탄하면서 점점 북한 무기를 우크라이나 전쟁의 주요 변수처럼 대했습니다. 특히 지난해 7월 쇼이구 러시아 당시 국방부장관이 북한을 방문하자 미 국무부장관은 무기 확보를 위해 간 것이라고 단정하며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그리고 쇼이구 방북 5일 후 러시아 공군기가 북한에 들어가자 무기를 실어 나르기 위해 들어간 것이라며 예의주시했습니다.
올해 초 백악관은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포탄에 이어 탄도미사일까지 받았고 일부를 이미 우크라이나 공격에 사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도 국내 언론은 반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요구한다’고 떠들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은 모두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를 요구한다’고 긴장했습니다.
6월 열린 G7 정상회의도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탄도미사일 수출과 러시아의 조달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러시아의 이러한 미사일 사용 등 북한과 러시아 간 군사 협력 증가를 가능한 가장 강력한 용어로 규탄”했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장관 역시 6월 18일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 후 “북한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당량의 탄약과 그 외 무기들을 러시아에 제공하고 있다”라며 “이를 차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3일에도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이미 북한의 러시아 지원이 우크라이나에 미치는 영향을 봤다”라며 “북한의 전쟁 지원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계속해서 조처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크라이나도 북한의 무기 지원을 경계했습니다. 지난 6월 키이우에서 열린 영국-우크라이나 국방부 합동 콘퍼런스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사용한 포탄 중 36% 이상이 북한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북한이 대공포탄, 탄도미사일, 지대공 미사일, 차량과 전차 부품을 러시아에 제공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북한은 대러 무기 제공을 부인하지만 미국과 우크라이나, 유럽 등은 북한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힘들어졌다며 아우성입니다. 미국은 자신이 야심 차게 준비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북한 때문에 틀어졌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중국 봉쇄
미국의 대통령들은 중국 때문에 자국 경제가 힘들다며 중국 경제를 무너뜨려야 미국이 살아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미중 경제 전쟁을 시작했고 전 세계를 향해 중국 경제 봉쇄에 동참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특히 반도체 봉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우리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도 중국과 거래를 끊고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는 압력에 시달렸습니다.
미국은 중국 경제를 무너뜨리면 거대한 중국 소비 시장을 미국 자본이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실 이미 중국에는 애플, 테슬라 등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진출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걸로는 부족하고 아예 중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탐욕을 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대부분 나라의 무역 상대국 1순위였기 때문에 중국 경제 봉쇄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나라가 미국 눈치를 보면서도 중국과 거래를 계속했고 심지어 미국 반도체 기업들도 중국과의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 규제를 회피하는 잔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미국 뜻대로 굴러가려면 결국 전쟁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명분으로 유럽의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시킨 것처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 주면 전 세계 나라에 중국 봉쇄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이 가만히 있는 대만을 갑자기 침공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을 지원해 중국을 자극하면서 2027년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는 소문을 계속 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거의 똑같은 수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북한이 미국의 발목을 잡습니다.
대만 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려면 아무도 중국을 도와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보기에 세계 모든 나라가 등을 돌려도 북한만은 중국 편을 들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은 중국과 붙어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밀접하게 지원이 가능합니다.
최근 미국은 대만 전쟁이 발발하면 주한미군은 물론이고 한국도 참전 혹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7일 인도·태평양 지역의 미 육군을 지휘하는 찰스 플린 미 태평양 육군 사령관은 채널A와 대담에서 대만에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한국군이 동맹의 힘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면 기쁠 것 같다”라며 한국군의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는 주장도 동시에 나옵니다. 「2018 국방 전략서」를 설계한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는 “대만 유사시 한국은 중국의 공격에 따른 직접적인 방어에도 전념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군이 대만을 도울 게 아니라 한국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4월 9일 조선일보 칼럼에서 “대만해협 사태 시 주일미군에 이어 주한미군까지 군사행동에 나서게 되면 한반도에 ‘힘의 공백’이 불가피”하다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급속도로 올라간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철 박사는 『이미 시작된 전쟁』에서 대만 전쟁과 한반도 전쟁은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며 주한미군이 북한군을 상대하느라 한반도에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이 대만을 신속히 점령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대만 전쟁과 한반도 전쟁은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가 일어나면 나머지 하나도 자동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북한과 중국은 우호·협조·상호원조조약에 따라 어느 한 나라에 전쟁이 나면 다른 한 나라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만에 전쟁이 나면 북한은 즉각 도움에 나설 것입니다. 그게 대만 전쟁에 직접 참전하는 형태일 수도 있지만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을 공격하는 형태일 수도 있고 나아가 괌이나 하와이 같은 주요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주한미군을 공격하는 순간 한반도는 전면전으로 이행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에 함부로 반격할 수도 없습니다. 자칫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미국 본토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미국은 대만 전쟁으로 중국을 무너뜨리려다가 거꾸로 대만도 뺏기고 한국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지요. 그것도 두 개나.
따라서 미국이 절박하게 추진 중인 대만 전쟁도 북한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일단 2027년이라는 연도를 박아놓고 준비하고 있지만 그사이에 상황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 * *
우크라이나 전쟁, 대만 전쟁은 일극 체제 붕괴를 막으려는 미국의 핵심 수단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북한 때문에 막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을 직접 공격할 수도 없습니다. 북한이 2017년 11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후 미국의 당국자들은 북한의 본토 핵공격 위협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 전략을 걸음걸음 파탄 내는 북한이 어느덧 국제 관계의 최대 행위자가 되었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전략국가’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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