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월 20일, 지춘란은 팔공산 산정에 구축한 아지트에서 특별수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된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체포되었지만 법정 투쟁에서 군인으로 포로 예우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또한 1954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4회에 걸쳐 재판하면서 그녀는 법정에서 자신은 전투 요원이 아니라 간호장교임을 특히 강조했다. 그뿐 아니라 지춘란은 적십자 요원이므로 즉시 이북으로 송환해 줄 것을 주장했다.
지춘란은 최후 진술에서 ‘베트남 정전회담 때 호찌민 동지는 프랑스 간호장교를 즉석에서 석방하고 돌려보낸 역사를 알고 있다’라고 예를 들며 송환을 적극 요구했다.
제3지대장 남도부는 베트남 정전회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같았고, 지춘란에게 ‘간호장교’를 강조하라고 이야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으로, 부군 황금수가 “너는 간호장이고 한반도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북한군 출신도 아닌 팔로군 출신이기 때문에 이놈들이 함부로 사형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남도부가 지춘란에게 말했다고 한다.
남도부와 지춘란은 최대한 법정 투쟁을 통해서 포로 송환 문제를 야기(惹起)했다. 이로써 정당한 포로 예우를 받고자 한 것으로 추론된다.
전쟁 시기 북한군과 빨치산은 월남(越南)에 대해 학습했다. 베트남을 월남이라 불렀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와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 선언
프랑스는 늦게 동남아시아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하나같이 제국들은 식민지 개척에 종교를 이용했다. 프랑스 또한 가톨릭 포교 구실로 베트남에 들어갔다.
1885년 프랑스는 청프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를 하나로 묶어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형태로 식민 지배했다. 그리고 베트남을 북부 통킹(Tongkin)과 중부 안남(Annam), 남부 코친차이나(Cochinchine)로 나누어 분할통치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후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인도차이나를 손아귀에 넣고 프랑스 대신 베트남을 식민 지배한다.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41년 5월에 결성한 베트민(Viet Minh, 베트남 독립동맹회, 越盟)으로 결집해 ‘8월 혁명’을 일으킨다.
‘8월 혁명’은 대중적인 정치 운동으로 베트민의 무장세력,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친일 정치조직에 가담했던 사람, 어떠한 정치조직에도 관여하지 않고 있던 다양한 사람이 광범하게 참여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일본 식민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연합군이 진주해오기 전에 바딘광장(Ba Dinh Square)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호찌민은 ‘낡은 카키색 옷과 샌들’로 인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스타일은 그 후의 호찌민을 상징하게 된다. 위풍당당한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라, 베트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상복을 입은’ 시골의 노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베트남 인민은 그런 그를 ‘호 아저씨’라 부르며 불멸의 최고지도자로 존경했다.
만약 호찌민의 ‘베트남 민족 독립’과 ‘베트남 통일’을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다면, 그 후 30년에 걸친 제1·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은 베트남 해방은커녕 식민 지배를 더 강화했다.
미국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개입과 베트민의 승리
베트남은 민족주의자 호찌민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고, 이후 호찌민의 지도하에 독자적 길을 걸어가나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정세에 휘말린다.
1947년 9월 코민포름(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이 결성되었다. 프롤레타리아 전정(專政)의 구현 중 하나인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베트남도 채택하면서 ‘냉전’에 대처한다.
그러나 구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는 식민 지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1946년 11월에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을 폭격함으로써 재침략한다. 이른바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8년 전쟁이 벌어진다.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복귀를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 전체를 무장시키기에 충분한 소형화기와 기관총 30만 정 그리고 10억 달러를 미국은 제공한다. 모두 합해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비용의 80%를 부담했다.
그러나 중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건국하면서 베트민의 항전은 힘을 얻게 된다. 특히 중국혁명의 성공은 아시아 약소국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전쟁에 자신감과 희망을 주었다.
후루타 모토오 도쿄대 교수는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학고방, 2021)에서 중국혁명이 베트남에 준 영향을 설명했다.
“류사오치는 1949년 11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오세아니아 노동조합회의에서 중국혁명의 경험을 ① 광범한 민족통일전선, ② 통일전선에 대한 공산당의 지도, ③ 강고한 공산당, ④ 무장투쟁과 근거지의 4가지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중국 모델 내지는 ‘마오쩌둥의 길’은 스탈린으로부터도 아시아혁명의 보편적인 모델로 인정받았다.
(중략)
중국의 경험은 아시아 각국 공산당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베트남인 공산주의자는 중국 모델을 수용하는데 유달리 빠르고 명확한 자세를 취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은 1950년 1월 1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했다.
호찌민은 1951년 2월에 개최된 인도차이나공산당 제2차 대회에서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을 ‘아시아혁명의 총사령관’으로 불렀다.
제네바 회담과 프랑스 간호중위 주느비에브 드 갈라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동서 냉전 속에서 6·25전쟁과 마찬가지로 장기전 양상으로 전개된다.
중국은 1953년 7월 6·25전쟁을 정전으로 일단 종식하고, 유엔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대공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베트민군에게 무상으로 공여하며 지원했다. 베트민은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승리하고, 베트남 지역 4분의 3을 차지하면서 제네바 회담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그러나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0일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진행한 제네바 회담은 전쟁의 승패보다 미국·영국·프랑스와 소련·중국, 5대 강국 의도대로 회담이 진행됐다.
결국 베트남은 실행이 담보되지 않은 2년 후의 ‘남북통일 선거’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대신에 국토는 한국·북한과 마찬가지로 남북으로 분단된다.
이 제네바 회담에서 지춘란이 법정에서 주장한 ‘프랑스 간호장교’가 언론에 등장한다.
인터넷판 MS투데이(2023년 1월 24일) 「[최광익의 교육만평] 전장의 천사와 잊힌 여성들」 기사이다.
“1954년 3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57일간 베트남과 라오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와 베트민(Vietminh·월맹) 사이에 세기의 전투가 벌어졌다. 여러 차례 영화 소재가 됐던 이 전투는 예상과 달리 우세한 화력의 프랑스군이 완패해 베트남이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군은 2,293명이 전사하고 4,43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만 1,721명이 포로가 됐다.
이 전투는 예상치 못했던 프랑스의 패배와 2만여 명의 프랑스군 중 단 한 명의 여군으로 인해 서방 언론들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주느비에브 드 갈라르 중위는 프랑스 공군 소속의 항공 간호사로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중략)
1954년 3월 27일 40번째 비행 중 그녀가 탄 비행기는 엔진 고장을 일으켜 디엔비엔푸 활주로에 비상 착륙했고, 이어진 베트민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이로써 그녀는 프랑스군 중 전장에 갇힌 유일한 여군이 되었다. (중략)
주느비에브는 40일간 프랑스군으로, 17일간 포로로 부상병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믿기지 않는 프랑스의 패배와 전장에서의 단 한 명 여군의 존재는 날이 갈수록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어느 순간부터 언론은 그녀를 ‘천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세계적 관심에 부담을 느낀 베트민은 그녀를 프랑스군이 있는 하노이로 석방했다.”
지춘란, 적십자 요원으로 송환을 요구하다
지춘란은 프랑스 간호중위 주느비에브 드 갈라르와 마찬가지로 같은 적십자 요원이다.
국제적십자는 전시에 적군과 아군 가리지 않고 부상병에게 보호와 간호를 제공하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활동’을 한다. 또한 무력 충돌에 직접 영향을 받는 민간인뿐 아니라 전쟁으로 물, 식량, 보건 진료, 거처, 의복 등 필수적인 것을 박탈당한 어린이, 여성, 노인 등을 구호(救護)한다.
지춘란은 중국의 인민해방전쟁과 북한의 한국전쟁에 참전하며 2개의 전선에서 미국과 싸웠지만 의료 요원으로 국제적십자 정신에 따라 적군과 아군 차별 없이 간호했다.
의료 요원은 전투병과 달리 ‘중립적이고 독립적’이다.
부군 황금수는 “국공내전 당시 지춘란은 총은 가지고 다녔지만 워낙 전상자가 많아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의료 행위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전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차별 치료한다는 것은 의료 요원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지춘란은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남도부와 지춘란의 중앙고등군법재판에 대한 조선일보(1954.10.15.) 기사이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당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최근의 인지[印支, 필자 주 :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를 차지한 옛 프랑스령 연방. 지금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세 독립국으로 되어 있다.]전쟁에서 호찌민 공산군은 프랑스의 간호장교를 즉시 보낸 사실이 있는 만큼 나는 적십자(赤十字) 요원이니 즉시 이북으로 보내주길 바란다.”
지춘란은 이미 인도차이나전쟁과 베트남, 호찌민 등 국제정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십자 운동과 1949년 국제인도법의 주요 조약인 제네바 4개 협약 중 제 3협약(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어 이북으로 송환을 주장했다.
『지리산특보』는 주한 미8군 사령부 심리전 부대가 빨치산과 지역 주민을 타깃으로 정기적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지리산특보』는 제호를 갖추고 호수를 매겨가며 신문형식으로 제작했다. 빨치산 간부 체포나 투항 소식, 지역 주민을 상대로 한 빨치산 소탕 협조 요청을 주요 메시지로 실었다.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삐라 심리전』, 뉴스타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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