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프지 말자는 게 추석 인사가 됐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의료 제도나 의사 실력이 세계적으로도 호평을 받았는데 이번 일로 일거에 무너졌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의료대란 초기에는 윤석열 정권과 의사 집단 양쪽 모두 문제라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의대 증원을 무식하게 밀어붙인 책임이 있고, 의사 집단은 국민 생명을 볼모로 밥그릇 챙기기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윤석열에게 비판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의견이 분분한 건 여전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사태의 본질인 2천 명 의대 증원이 맞냐는 것입니다. 윤석열의 막가파식 추진도 문제지만 애초에 사태의 발단이 된 2천 명 증원이 옳은가 그른가에 따라 의료대란을 풀어나갈 방향도 바뀌게 됩니다.
의대 증원 과정
의대 증원을 추진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고령화도 빨라지는데 26년 동안 의대 정원이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대 증원은 언젠가 논의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습니다. 참고로 2024학년도 의대 정원은 총 3,058명입니다.
2022년 윤석열 정부가 의대 증원을 다시 언급하기 시작했고 2023년 1월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가 협의에 돌입, 6월 초 의대 정원 확대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의료 수요자, 전문가로 논의의 틀을 넓혀 증원 규모를 논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증원 규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협의 반발이 나왔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부에서 ‘2025학년도부터 증원’, ‘임기 내 3,000명 증원’ 등의 이야기가 나왔고 의협은 “정원 확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법 정비와 재정 투입 등을 생략하고, 단순하게 의대 정원을 늘리려” 한다고 반발했습니다. 정부가 충분한 논의와 준비 없이 증원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복지부가 취합한 2025학년도 대학별 증원 희망 규모는 최소 2,151명에서 최대 2,874명으로 나왔습니다. 대학 측에서야 학생 수가 늘면 수입이 늘어나니 무조건 많이 늘리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는 적정 규모가 350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현재의 10%가 조금 넘는 수인데 현실적으로 대학이 수용할 수 있는 게 저 정도라는 것입니다.
정부와 의협의 협의는 이어졌지만 좀처럼 시각차가 줄어들지 않는 가운데 11월 들어 의협이 파업을 예고했고 정부는 파업하면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겠다고 경고하며 갈등이 커졌습니다. 정부는 2025학년도부터 반영하려면 늦어도 2024년 4월에는 학교별 증원 규모를 결정해야 한다며 논의를 서둘렀습니다.
마침내 올해 2월 6일 정부는 2천 명 증원안을 발표했습니다. 2035년까지 1만 명의 의사를 늘리기 위해 5년 동안 의대생을 매년 2천 명씩 더 받겠다는 것입니다. 3,058명에서 5,058명으로 무려 65%나 한꺼번에 늘리는 것입니다. 의협은 즉각 총파업을 선언했고 정부는 강력히 대응한다고 경고했습니다.
3월 20일 정부는 2025학년도 의대 입학정원을 발표했습니다. 이미 발표한 대로 2천 명이 늘어났습니다. 다만 이후 조정 과정을 거쳐 5월 30일 대학별 입시요강 정원은 총 1,497명이 늘어난 4,610명이었습니다. 이날 발표에 따라 수험생들이 입시 준비를 하므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사 수를 늘리기 전에
의사 수를 늘리는 데는 대부분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얼마나, 어떻게, 어떤 의사를 늘릴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일단 의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모든 과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의사가 부족한 과는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뇌혈관외과 등으로 매년 전공의 미달 사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 지방 의료 붕괴가 이미 시작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방에 의사가 부족합니다.
이런 곳에 의사가 부족한 이유는 환경이 열악하고 근무 강도도 센데 다른 의사에 비해 수입이 적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수도권에서 미용 관련 과 의사를 하면 위험 부담이 적고 수요가 많아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그쪽으로 가려고 해 의사가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의사 수만 늘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의사 수를 늘린다고 모든 과와 지역에 의사가 골고루 늘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실제 의사가 부족한 곳의 수를 늘리기 위한 법,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원자가 적은 과나 지역의 혜택을 늘린다거나, 입학생 모집을 할 때부터 분리 모집을 해서 부족한 과의 의사 수를 확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방 의대의 경우 의사가 된 후 자기 지역에서 10년 정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는 지역의사제를 도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실제로 경남의 경상국립대는 2025학년도부터 졸업 후 10년간 지역에서 의무 근무하는 지역의사전형을 신설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정원의 5% 수준인 10명 내외를 뽑는 등 시범 단계입니다. 이런 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법안도 발의되어 있지만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법, 제도적 대책을 세운 뒤에 의사 수를 늘려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2천 명 증원의 근거는 뭔가
증원 규모를 2천 명으로 결정한 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지도 의문입니다. 애초에 문재인 정부가 400명 증원을 추진한 것과 너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수천 장의 근거자료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2천 명이라는 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게 재판 결과 드러났습니다.
3월 5일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가 서울행정법원에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이에 서울고등법원이 정부에 의대 입학정원을 결정한 과학적 증거와 회의록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부가 얘기한 수천 장의 근거자료가 과연 무엇일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정부가 제출한 자료는 기존 보고서 3개가 전부였습니다. 게다가 정부는 기존 보고서조차 왜곡했습니다.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인력 적정성 연구」를 작성한 홍윤철 서울의대 교수는 가장 합리적 증원 규모가 500~1,000명이라며 보고서에 2,000명이 적절하다는 내용은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은 의료제도 개선을 주장했지만 그런 내용은 정부 정책에서 빠졌다고 주장했습니다.
「2021년 장래인구추계를 반영한 인구변화의 노동·교육·의료부문 파급효과 전망」을 쓴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입학 정원을 매년 5%씩 2030년까지 늘리고 이후에는 2030년 수준을 유지하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2025학년도 입학 정원은 2천 명이 아닌 150명 정도 늘려야 합니다.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 및 중장기 수급 추계 연구」를 쓴 신영석 고려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2035년에 의사가 1만 명 이상 부족하다고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2천 명씩 증원하는 게 맞는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부족한 의사 수를 계산한 것이지 증원 방법을 연구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정책 변화에 따라 의사 인력은 부족할 수도, 남을 수도 있다”라며 “차라리 10년을 기준으로 한 해에 1,000명씩 증원하는 방향으로 가기를 바란다. 호흡을 길게 가지고 속도 조절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즉, 정부는 2천 명 증원 결정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황당한 건 정부가 관련 회의록을 법원에 제출하지 못한 것입니다. 증원 논의를 한 의료현안협의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의사인력전문위원회 모두 회의록이 전무하다고 합니다. 복지부는 “협의체는 회의록 작성 등이 의무화돼 있는 법상 회의체가 아니어서 별도 관리하는 회의록이 없다”라고 해명했습니다.
결국 5월 17일 서울고등법원은 “2천 명이라는 수치 그 자체에 관한 직접적인 근거는 특별한 것이 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8월 16일 국회 교육부, 복지부 연석 청문회에서는 회의록을 파기했다고 밝혀 논란이 되었습니다. 청문회에 참석한 오석환 교육부 차관은 “(회의록을) 행정상 보관하지 않는 걸로, 파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회의록을 쓰긴 했는데 뭔가 숨겨야 할 게 있었는지 파쇄한 것입니다.
또 의대 정원을 각 대학에 배정하는 역할을 담당한 배정심사위원회는 명단과 회의록을 모두 비공개해 밀실 짬짜미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윤석열은 과학적, 합리적 이유도 없이 2천 명 증원을 결정하고 밀어붙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튀어나온 게 천공입니다. 원래 윤석열이 뭔가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정책을 밀어붙여서 대체 왜 저러나 싶을 때면 꼭 천공의 관련 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천공이 2천 명 증원을 지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습니다. 혹자는 천공 이름이 ‘이천공’이라서 2천 명을 고집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8월 29일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가 유튜브 방송 ‘시사끝짱’에 출연해 의대 증원에 관한 김건희 여사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진중권은 김건희가 2천 명이라는 수에 “굉장히 뭐랄까 완강하더라. 이거 뭐 과학적으로 된 거고. 블라블라블라 얘기하는데…”라고 했습니다. 김건희가 2천 명 증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석열에게 천공을 소개한 사람이 김건희임을 생각해 보면 김건희도 천공의 말을 듣고 2천 명 증원을 ‘지상명령’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진중권은 “대통령 주위에도 많은 의사들이 있지 않겠느냐”라며 “이들이 얘기를 하기만 해도 대통령이 불같이 격노를 하기 때문에 아예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신성’한 천공의 지시에 토를 다는 것 자체를 불경한 일로 여기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과학적 근거로 결정한 거면 그냥 근거를 보여주면 끝나기 때문에 ‘격노’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더 황당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의사가 1만 명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은 윤석열이 “그래? 그럼 5년간 2천 명씩 늘리면 5 곱하기 2는 10이니까 딱 1만 명 되는 거 아냐? 내 말이 맞지?”라면서 자기 암산 실력에 감탄했을 수 있습니다. 아마 자기가 굉장한 과학적 착상을 했다고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원래 윤석열은 자기가 잘 모르는 전문 분야에 관해서도 아는 척을 하면서 우겨서 주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습니다. 군부대를 방문해서 자주포 포신을 낮추면 탱크 기능도 하는 거 아니냐고 우기면서 전문가의 말문을 막히게 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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