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레바논의 유력 정당인 헤즈볼라를 표적으로 삼은 ‘폭발 테러’를 일으킨 뒤 파장이 커지고 있다.
지난 9월 17일(이하 현지 시각) 레바논 곳곳에서 ‘삐삐’(무선 호출기) 수천 대가 동시에 폭발했다. 다음날인 9월 18일에는 헤즈볼라 대원들이 가지고 있던 휴대용 무전기가 한꺼번에 터졌다.
잇달아 발생한 폭발 테러로 어린이 등 민간인을 포함해 3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간신히 살아남은 3,000여 명은 눈을 잃고 손가락이 통째로 절단되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중태에 빠진 피해자가 많아서 폭발 테러에 따른 레바논 국민의 희생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폭발 테러는 이스라엘 정보 당국이 일으켰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중론이다.
9월 19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폭발 테러에 관해 보고를 받은 정보 당국자는 “(이스라엘의) 이번 작전은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거쳐 준비됐다”라고 밝혔다.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지난해 10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휴대전화 폐기’를 헤즈볼라 대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후 헤즈볼라 대원들은 위치 추적과 도청이 불가능한 무선 호출기 5,000대를 구입했다고 한다. 하마스와 밀접한 헤즈볼라로서는 이스라엘 측의 테러를 사전에 방지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측이 폭발 테러를 목적으로 몇 년 전 만들어둔 무선 호출기가 헤즈볼라 측에 유통됐다고 한다. 표면상 무선 호출기는 헝가리 소재 무역회사 ‘BAC 컨설팅’이 생산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실체는 이스라엘 정보 당국이 운영하는 ‘유령 회사’였고, 이스라엘 정보 당국이 기폭장치가 들어간 무선 호출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레바논 현지에서는 앞으로도 폭발 테러가 계속될 것이란 공포가 가시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심지어 휴대전화에도 폭발물을 설치한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시민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고 한다.
레바논에서 공포 분위기가 계속되는 건 이스라엘이 과거에 저지른 비슷한 테러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1972년 이스라엘의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는 프랑스 파리에 주재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간부 마무드 함샤리의 자택 유선 전화기에 폭탄을 설치했다. 중상을 입은 함샤리는 한 달 뒤 숨졌다.
1996년에는 이스라엘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가 휴대전화로 하마스의 기술자 야히아 아야시를 암살했다. 아야시는 이스라엘에 포섭된 팔레스타인 주민이 건넨 휴대전화를 쓰던 중 휴대전화가 폭발해 숨졌다.
아랍권 유력 매체 알자지라는 9월 18일 「The Lebanon pager attack: Israel’s terror playbook strikes again(레바논 호출기 공격: 이스라엘의 테러 각본이 다시 공격하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무차별 폭력은 이스라엘이 가장 좋아하는 전술”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해 레바논 국민, 레바논에 머무는 팔레스타인 주민 수만 명 학살 ▲200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34일 동안 공격해 레바논 국민 약 1,200명을 학살하며 기반 시설을 파괴하는 등 ‘이스라엘이 저지른 테러’ 사례를 언급했다.
기고문을 쓴 벨렌 페르난데스는 “이스라엘은 테러와 싸운다는 구실로 선별된 아랍 민간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국가”라면서 “작년 10월 이래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하느라 바빴고, 공식적으로는 41,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살해되었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몇 배나 더 많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폭발 테러로 큰 피해를 당한 레바논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 첫째 이유는 폭발 테러에 대응한 헤즈볼라의 보복을 명분으로 전면전을 벌이려는 이스라엘의 ‘막가파’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 둘째 이유는 이를 제지하지 않고 두고 보는 미국의 방관 때문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폭발 테러에 관한 언급을 삼가면서도, 헤즈볼라의 대응을 구실삼아 레바논 남부와 이스라엘 북부에서 무차별 공습을 강화하고 있다.
팔-이 전쟁 휴전을 주장하던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은 “(전쟁의) 무게 중심이 (이스라엘)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전쟁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이에 적응해야만 한다”라고 헤즈볼라와의 전면전 의사를 노골화했다.
네타냐후 정권으로서는 ‘하마스 소탕’을 목표로 내걸었던 팔-이 전쟁의 승리 가능성이 멀어지면서, 레바논과의 전면전을 정권 연장의 구실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옹호해 온 미국은 이번 폭발 테러의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으며 뒷짐만 지고 있다.
9월 21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특수부대 사령관인 이브라힘 아킬을 살해한 것을 두고 “언제든 미국인들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에게 정의가 구현되는 것은 좋은 결과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작 이스라엘이 자행한 폭발 테러를 언급하지 않는 이중기준을 드러냈다.
또 설리번 보좌관은 미국은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 휴전 협상을 제시할 상황이 아니라며, 레바논에서의 확전 상황을 묵인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 국무부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계속되는 분쟁이 예측 불가능하며 최근 레바논 전역에서 폭발이 발생했다”라면서 “미국 시민들에게 민간 비행편이 남아 있는 동안 레바논을 떠날 것을 권고한다”라고 발표했다.
미국으로선 레바논-이스라엘의 전면전과 폭발 테러 사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미국은 자신이 ‘테러와의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국가임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의 폭발 테러를 규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중동지역 각국을 상대로 테러와 전쟁을 일으키고, 미국이 이를 방조하는 상황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뒤부터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굳어졌다.
무선 호출기 수천 대를 한꺼번에 폭발시킨 최근 무차별 테러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테러 수위는 이전보다 극도로 높아졌지만, 모른 척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의 태도는 오히려 더욱 뻔뻔해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과 미국이 촉발시킨 중동지역 위기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뒷배로 있는 한 중동지역의 테러와 전운은 가시기 어려울 듯하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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