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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25) 지춘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9/25 [18:05]

[사람을 찾아서] (25) 지춘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9/25 [18:05]

지춘란은 판결문에 “괴뢰유격대 제3지대 간호장”이라고 분명히 조선인민군 소속이 나와 있다. 지춘란은 유격대 간호장 전쟁포로임에도 미 군정하에서 공포된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 지춘란 판결문.  [제공: 한찬욱]

 

「국방경비법」은 미 군정하에서 「조선국방경비법」(1946년 6월 15일 공포·시행, 군정법령 제86호)을 모태로 1948년 7월 5일 공포되고 그해 8월 4일 발효됐다.

 

미국은 이미 한반도 진주 초기부터 이남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독립된 군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단독국가를 전제로 하는 ‘국방’이라는 기존 용어 사용에 대한 소련 측의 항의 때문에 ‘경비’라는 명칭으로 ‘국방경비대’를 만들었다.

 

즉 군대는 창설할 수 없기 때문에 ‘국방’ 조직이라는 명칭 대신 ‘경비’ 조직이란 꼼수로 만든 것이 ‘국방경비대’이다. 

 

그리고 ‘국방경비대’를 유지하기 위한 군법으로 「국방경비법」을 제정한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에 부역한 반민족 인사, 특히 일제 경찰을 대거 고용한다

 

1945년 9월 3일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국 제24군단 사령관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은 제24군단 장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한국은 미국의 적이다. 그러므로 항복의 조례와 규정을 적용받는다.(Korea was an enemy of the United States and therefore subject to the provisions and the terms of surrender.)” (『한국전쟁의 기원』)

 

즉 미군은 군사적으로, 점령군으로 적대지역에 진주한 것이다.

 

그리고 하지 중장은 오키나와 주둔 미 제10군 제24군단의 사령관에서 주한 미군정 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은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에서 “하지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군정 사령관이 아니라, 총독으로 불러야 한다”라며 번역 오류라고 주장했다.

 

“하지 중장은 주한 미군 군정(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의 군정 총독 the military governor(일본 총독과 정확히 같은 개념이므로 ‘총독’으로 번역되어야 한다)이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황제와도 같은 권력의 자리였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고, 일제 순사복 대신 양키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제2의 미 제국 통치가 시작된다. 

 

도올 김용옥의 지적대로 미군정의 체제와 정책은 과거 일본 총독 시절과 같았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고, 일제에 부역한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 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에 고용된다.

 

특히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은 과거 일제 주구 노릇을 했던 자들로 채워졌고 간부는 거의 8할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 3』(청년사, 1994)에서 선정한 친일 ‘경찰’ 목차에 나오는 면면들이다.

 

“친일 경찰의 대부 최연, 친일 사찰 경찰의 총수 최운하, 친일 고문 경찰의 대명사 노덕술, 일경 출신의 타공 투사 김호익, 고문 출신의 엘리트 원일 경찰 최경진, 정치 깡패들 등에 업은 부부통령 곽영주, 해방 직후 암살된 친일 경찰 노주영”

 

그뿐 아니라 당시 한반도는 남과 북 모두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군사 조직을 구축한다.

 

미군정은 국군준비대를 강제 해산시키며 군사 조직을 구축한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나오는 미군정의 군사 조직 구축 과정이다. 

 

“미군정 당국은 진주 초기 건국준비위원회 등에서 지방 단위로 조직했던 自警 조직 등을 분쇄하면서 남한 전역에 대하여 통일적 통솔 체계를 가지는 군사 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한편으로 그 법제적인 기초를 미군의 ‘전시’ 군법으로부터 차용했으면서도, 다른 한편 국가가 부존재하는 점령지구 상태이기 때문에 ‘국방’ 조직이라는 명칭을 회피하여 ‘경비’ 조직을 표방해야 했다는 것은 초기 군 건설의 배경을 이룬 정치 상황의 모순적 성격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경비 조직으로서의 초기 형성은 군과 경찰이 조직의 형성 과정에서 상당 부분 유사한 출발점에 놓이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이 그 적용을 받는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현대적인 상식과 달리, 군사 조직에 관한 법률들은 그것이 비단 군 내부의 규율 관계뿐만 아니라 국민(엄밀하게 말해 당시는 인민)을 처벌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공개되지 않았고, 조직법의 은밀성이 보다 전면에 강조되었다. 

이 점은 이후 현대 법치주의적인 관점에서 오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미군정이 말하는 自警(자경) 조직이란 국군준비대를 지칭한다.

 

박세길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돌베개, 1998)에서 국군준비대 결성 과정을 설명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창건 과정에서 건국 사업을 뒷받침하고 내외 친일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위하기 위하여 자위대, 노동대, 치안대 등 각종 무장 단체들을 놀라울 정도의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광범위하게 결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후 미국에 의해 강제적인 군사적 점령이 이루어지자 이들 무장 단체들은 대원 수 6만여 명에 이르는 국군준비대로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대응 태세를 마련해 갔다.”

 

그러나 1945년 10월 15일 전북 남원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국군준비대가 크게 충돌한다.

 

미군정은 일본 육사와 만주군 출신들로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한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조선국방경비대(1946년 5월 1일 태릉에 설립)’를 창설한다. 

 

동시에 이남에서 자주적 치안권 및 행정권을 담당했던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에 의해 해산된다. 국군준비대 또한 강제 해체되면서 그 간부들은 체포되어 미군정에 의해 중형을 받는다.

 

대신 미군정청은 일제강점기 일본 군대의 하수인으로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반민족 일제 군인들을 대거 ‘조선국방경비대’로 고용, 편입시킨다. 

 

그리고 일본 육사 또는 만주군 출신들이 ‘조선국방경비대’의 골간을 이룬다. 

 

불행하게도 일제하 항일 무장 투쟁이나 독립 투쟁의 주역이 창군에 참여해야 마땅하나, 미군정은 자신들의 한반도 점령 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이들보다는 일제 군대의 하수인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일본 육사 대좌 출신인 이응준을 미군정청 군사 고문으로 임명하여 군대 창설에 착수한다. 이응준은 미군정 하에서 일본군 말단 장교들을 창군의 주역으로 성장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던 원로급 일본군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군 육사 제26기생과 제27기생이었다.

 

이들 중에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한 것을 비롯하여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도 출정한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러시아 적군과 중국공산당 홍군뿐만 아니라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등 조선 독립군들과도 전투를 했다.

 

또한 이승만의 오른팔인 일제 만주국 군의(軍醫) 출신인 원용덕을 ‘조선국방경비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 외 대표적 친일 인물인 일본 육사 출신 채병덕, 정일권, 박정희 그리고 이승만의 왼팔인 일본 관동군 헌병대 출신 김창룡과 만주군 중위로 6.25전쟁 때 빨치산 토벌을 지휘한 백선엽 등을 ‘조선국방경비대’에 끌어들인다.

 

‘조선국방경비대’를 운용하기 위해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을 공포한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나오는 국방 조직 개편 ‘미군정의 국방사령부 설치, 군무국의 창설, 육·해군부 설치, 경무 군사기관의 금지 (법령 28호)’에 대한 설명이다.

 

“미군정청은 1945년 11월 13일 공포·시행한 군정법령 제28호를 통하여 ‘조선의 종국의 독립을 준비하며, 세계국가에 오(伍)하야 조선의 주권과 대권의 보호, 안전에 필요한 병력을 급속히 준비’하며 ‘필요한 육·해군의 소집, 조직, 훈련, 준비를 시작’하기 위하여 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면서 그 산하에 군무국, 경무국을 두며, 군무국 내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국방사령부는 1946년 3월 29일 군정청의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이 군정법령은 정부수립 이후의 국군의 모체가 되는 군사 조직에 관한 최초 법령으로서, 남한 내에 여타의 군사·경찰 조직 설치를 금함으로써 해방 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등에서 설립한 경비 조직을 배제하고 군정의 실효성을 강화하였다는 의의도 가진다.”

 

그리고 미군정은 ‘조선국방경비대’를 운용하기 위해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을 1948년 7월 5일 공포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기록되어 있는 ‘국방경비법 제정’ 배경이다.

 

“국방사령부가 설치되고 나서 미군정 당국은 장차 독립된 한국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군법이 필요하다고 여겨, 아고 대령을 책임자로 ‘국방경비법 제정’의 기초에 착수하였다.”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에 관한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설명이다.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은 모두 『미군정법령집류』에 1948년 7월 5일 자로 공포 내지 ‘공포 지시’한 것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 군정청 관보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그 법령 호수(號數)도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국방경비법」은 위 책자에 국문본만 수록되어 있고 영문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군정법령으로서 유효하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는데, 대법원(1999.1.26. 선고 98두16620 판결)과 헌법재판소(2001.4.26. 선고 98헌바79·86, 99헌바36(병합) 결정)에서는 모두 이들이 군정법령으로서 관보 이외의 방법으로 공포되었던 것으로 추단한 바 있다.”

 

그런데 군인·군무원 등 육군 관련 신분에만 적용되는 「국방경비법」이 민간에게도 적용됐다.

 

지춘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나오는 민간에 적용되는 「국방경비법」 설명이다.

 

“그러나 수많은 민간인에게 적용되었던 조항도 있는데, ‘직접, 간접으로 무기, 탄약, 양식, 금전 기타 물자로써 적을 구원 혹은 구원을 기도하거나 또는 고의로 적을 은닉 혹은 보호하거나 또는 적과 통신·연락 혹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여하한 자’를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32조(적에 대한 구원, 통신·연락 또는 방조), 그리고 ‘조선경비대의 여하한 요새지, 주둔지, 숙사 혹은 진영 내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또는 행동하는 여하한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33조(간첩)가 그것이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에서 첫 계엄이 선포된 이후 6.25전쟁 내내 계엄 아래 군사법원이 각 지역에 설치되었고 민간인에 대한 재판이 「국방경비법」으로 처리됐다. 

 

「국방경비법」과 「국가보안법」으로 형을 살았던 사람들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만기 출소하기 시작하자, 박정희 유신정권은 이들을 다시 1975년 7월 16일 제정된 ‘사회안전법’으로 옭아맨다.

 

‘사회안전법’은 대표적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일사부재리의 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이다. 1987년 6월항쟁 등으로 위헌적 법률이라는 견해와 그 비인도성으로 하여 1989년 5월 29일 ‘사회안전법’은 국회에서 폐지된다.

 

그러나 ‘사회안전법’에 대한 대체입법으로 제정된 보안관찰법 역시 보안 감호 처분만 삭제되었을 뿐 ‘사회안전법’상의 주거 제한 처분과 보안 관찰 처분은 그대로 남겨두고 있어 끊임없는 주거 제한과 감시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1969년 지춘란과 결혼한 ‘민간인’ 황금수 또한 1950년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행위)로 구속되고, 해방공간 1948년과 4.19혁명 후 1961년 5.16쿠데타로 2번 체포된다. 그리고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1988년 12월 출소하지만, 이후 보안사 등으로부터 계속해서 민간 사찰을 당해왔었다.

 

김동춘의 『권력과 사상통제』(역사공간, 2024)에서 정의한 「국방경비법」 제32조 설명이다.

 

“제32조 이적행위 종류에 대하여 ‘다종다양이나 적을 유리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는 직접, 간접 또는 평시, 전시를 막론하고 이적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방조, 은닉(숨겨두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 또는 묵인하는 것도 포함)’ 등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지춘란은 판결문에 적시된 대로 “괴뢰유격대 제3지대 간호장” 조선인민군인데, 민간인에게 적용한 이적행위 제32조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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