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경남 창원시 창원시립마산박물관(마산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조선총독의 글씨를 새긴 ‘일제 기념 석각’이 전시 중이었다. 논란이 된 석각(돌에 글씨를 새긴 조각)은 지난 11월 8일 대학생들의 ‘철거 투쟁’으로 훼손돼 일시 철거된 상태다.
마산박물관은 석각이 일시 철거되기 전까지 비가림막과 함께 받침대 위에 얹은 형태로 석각을 돋보이게 전시해 왔다. 심지어 야간 조명등까지 설치했다가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조명등을 철거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로 여겨져 줄곧 방치돼 온 석각이 ‘아름답게 전시’된 건 윤석열 정권 출범 뒤다. 이 글에서는 윤석열 정권과 일제 기념 석각의 수상한 관계를 들여다본다.
1930년 봄, 조선총독과 마산부윤은 왜 글씨를 새겼나
먼저 해당 석각에 어떤 내용이 담겼고,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부터 짚어보자.
논란이 된 두 개의 석각이 만들어진 건 일제강점기인 1930년 봄이다.
1941년 발간된 책 『약진 마산의 전모』에 따르면, 1930년 무렵 일제와 마산부(마산시)는 800가구 4,000명에게 수돗물을 공급할 수 있는 추산정수장을 건립했고 이를 기념하는 석각을 세웠다. 석각에는 만들어진 시기인 경오춘(庚午春·1930년 봄)이 새겨져 있다.
또 석각에는 일제강점기 제3·5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斎藤誠)의 글씨 산명수청(山明水淸·산수가 맑고 깨끗하여 경치가 좋음), 5대 마산부윤(마산시장) 이타가키 다다지(板垣只二)의 글씨 수덕무강(水德无疆·물의 덕은 너무나 커서 그 끝이 없음)이 새겨져 있다.
이를 두고 창원시 문화시설사업소는 “마산 최초의 정수장인 추산정수장으로 사용됐던 장소임을 알리고 우리 고장의 어두운 역사를 후세에 전달하여 이를 통해 어떻게 교훈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석각을 전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애초 추산정수장이 공급하는 수돗물이 일본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위 해명이 석연찮다는 지적이 나온다.
창원지역 시민사회단체인 ‘열린사회 희망연대’는 “조선총독과 마산부윤이 자신들이 건설한 상수도 시설에 대해 스스로 감개무량해 쓴 글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상수도 수혜자는 주로 일본인들이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거주한 지역이 주로 추산동과 자산동을 비롯한 신마산 일대였고, 수도 시설도 일본 가옥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중 극히 일부 친일 부역자 조선인들만 수돗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석각은 해방 이후 1995년 김영삼 정권 시기 ‘민족정기 살리기’ 사업이 진행되자 마산합포구 산호공원으로 옮겨졌다. 석각은 독립운동가, 언론인인 ‘목발 김형윤’ 선생 불망비 앞 화단 바닥에 놓였다. 시민들은 김형윤 선생의 불망비를 참배하면서 석각을 발로 밟았다고 한다. 석각은 마치 광주 망월동 묘역에 있는 ‘전두환 비석’과도 같았다.
그러다 2001년 9월 추산정수장 옛터에 마산박물관이 건립된 뒤 석각이 다시 옮겨졌다. 석각은 마산박물관에 딸린 주차장 근처 화단에 놓여 있었다. 근처를 오가는 시민들은 20년 넘게 석각을 밟으며 일제강점기의 치욕을 되새겼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흉물로 여겨져 방치되던 석각이 난데없이 ‘호화 전시’ 논란에 휩싸인 건 윤석열 정권이 출범한 뒤의 일이다.
대통령 윤석열과 창원시장 홍남표의 연결고리
“국힘 소속 창원시장 홍남표는 돌았나? 친일에 진심인 윤석열과 추종세력이 나라를 일제강점기 시즌 2로 만들고 있다.”
위는 한 누리꾼이 자신의 엑스(옛 트위터)에 남긴 말로 윤석열 정권과 홍남표 창원시장의 친일 정책을 지적한 것이다.
마산박물관은 창원시 산하 문화시설사업소가 관할하므로 창원시장이 총책임자다. 따라서 석각의 전시와 ‘친윤계’인 현 홍남표 창원시장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권이 출범한 2022년 5월 10일 홍남표 국힘당 창원시장 후보 선거대책위원회는 “윤석열 대통령·홍남표 후보와 함께 창원시를 발전시켜야 할 책임감을 새삼 느낀다”라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이후 윤 대통령은 6.1지방선거가 끝나고 창원을 찾아 홍남표 시장을 직접 만나 격려했다.
최근 홍남표 시장은 윤 대통령, 김건희 씨와 친분을 과시하는 정치브로커 명태균 씨의 ‘여론조작’으로 부정 당선됐다는 의혹에도 휩싸였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지난 10월 22일 「[단독] 명태균, 홍남표 창원시장 당선 때도 여론 조작 의혹」 기사를 보도했다. 공천개입 논란의 중심에 있는 명태균 씨가 지난 2022년 6.1지방선거 당시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여론조작을 통해 홍 시장을 당선시켰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홍남표 후보는 창원지역에서 잘 알려진 인사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홍남표 후보는 국힘당에서 예비후보 경선조차 통과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런데 명태균 씨가 관여하는 여론조사 업체 PNR(피플네트웍스리서치)의 국힘당 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홍남표 후보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홍남표 후보는 이 여론조사를 근거로 국힘당 경선을 거쳐 창원시장에 당선됐다.
이는 윤 대통령과 홍남표 시장이 명태균 씨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음을 보여준다.
정권 출범 뒤 윤 대통령은 중요 기관 곳곳에 뉴라이트 인사들을 기용해 친일매국 정책을 추진했다. 홍남표 시장이 취임하고 나서는 마산박물관에 일제 기념 석각이 돋보이게 설치됐다. 윤 대통령과 홍남표 시장의 관계를 고려하면 석각의 호화 전시는 윤석열 정권의 뜻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마산박물관이 있는 지역구에는 ‘친윤계’인 윤한홍 국회의원(마산회원구)이 있다. 윤한홍 의원은 윤 대통령의 뉴라이트 인사 기용을 앞장서서 적극 두둔해 왔다.
이를 볼 때 창원시 전반에서 윤석열 정권의 뉴라이트 기조에 맞는 정책이 추진되는 정황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의 석각이 ‘호화 전시’되기까지
창원시는 2022년 5월 13일 창원시립박물관 운영자문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당시 창원시는 민주당 소속 허정무 시장이 재선 출마를 위해 퇴임해 ‘행정 공백’ 상태였다.
당시 운영자문위는 야외전시장 정비 사업을 논의하며 지역의 문화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야외 역사 교육장 조성을 위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창원시 문화시설사업소는 석각 전시에 관해 2022년 5월에 전시를 계획해 9월에 마쳤다고 밝힌 바 있다. 석각 설치가 창원시의 행정 공백기, 홍남표 시장의 재임 시기에 걸쳐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 ‘열린사회 희망연대’의 김영만 상임고문은 “전임 시장은 (6.1지방)선거를 앞두고 그해 4월 말에 직무가 정지됐고 행정부시장이 직무를 보고 있었다”라면서 “2022년 5월~9월 사이 석물(석각)을 지금처럼 전시하도록 누가 기획하고 결재를 했는지에 대해 조사해서 밝혀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석각의 호화 전시와 관련해 수상한 정황은 또 있다.
2022년 9월 25일 ‘마산박물관 서포터즈’로 활동한 누리꾼이 ‘창원시립마산박물관-야외전시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마산박물관이 지정한 야외전시물로는 ▲중생대 백악기 경상남도지역에서 살았던 다양한 새들의 흔적인 ‘진동새 발자국 화석’ ▲경상남도 지정 기념물인 ‘월영대’의 복제품 ▲신라 후반기의 학자 최치원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기리며 고려·조선시대 대학자 13인(정지상, 이황 등)의 시를 새긴 ‘13인 시비’ ▲고려 충렬왕 시기 고려와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마산 주둔 시 군량미를 도정한 맷돌로 추정되는 ‘몽고정 맷돌’ ▲1966년 어린이날을 맞아 3·15의거 기념탑 앞에 건립된 비석을 옮겨놓은 ‘어린이헌장 비석’ ▲1930년 마산박물관 옛터에 설립된 추산정수장 완공을 기념하고자 당시 조선총독과 마산부윤의 글씨를 새긴 석각이 있다.
야외전시장 목록을 보면 석각만 유일하게 일제강점기를 기념한 유물임이 확인된다.
마산박물관은 2022년 10월 12일 야외 시범운영을 끝내고 야외전시장을 정식 개장했다. 이후 근처를 지나던 시민들의 제보로 ‘석각 호화 전시’가 알려지면서 논란이 번졌다.
논란이 계속되자 올해 10월 23일 창원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창원시의회 소속 민주당 시의원들은 석각 철거를 촉구했다.
김영만 상임고문은 “석물에 새겨진 두 글자는 우리 민족을 위한 내용이라기보다 당시 일본 왕을 위한 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며 “창원에도 일제강점기를 근대화로 받아들이는 뉴라이트 인식을 하는 공직자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 철거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1월 8일에는 대학생들이 석각을 빨간색 스프레이로 칠하고 해머로 내리쳐 파괴하려 시도했다. 비록 석각은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지만 “친일 잔재 청산”, “친일 사대매국 윤석열 탄핵”을 외친 대학생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던졌다.
철거 투쟁으로 연행됐다가 석방된 대학생 장 씨는 비가림막 아래 버젓이 전시된 석각을 보며 “우리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려 일제가 박아둔 쇠말뚝”이 떠올라 분노해 투쟁에 나섰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정권과 창원시가 관여하는 마산박물관이 친일을 미화하고 민족정기를 훼손하려는 의도로 석각을 설치한 것 아니겠냐고 의심했다.
윤 대통령과 홍남표 시장의 수상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 의혹 제기를 단순한 주장으로 볼 수만은 없을 듯하다.
석각 원상복구 검토하겠다는 마산박물관
훼손된 석각을 가림막으로 가려 놓던 마산박물관은 11월 11일 석각을 ‘일시 철거’해 수장고로 옮겼다.
같은 날 경남도민일보에 따르면 마산박물관은 일단 석각의 스프레이 칠을 벗겨내고 원상복구가 가능한지 등을 논의해 배치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마산박물관은 논란의 중심에 선 석각을 굳이 원상복구 해서 다시 배치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어떻게든 석각을 다시 배치하려는 윤석열 정권과 국힘당의 ‘친일 횡포’가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애초 마산박물관이 방치된 석각을 비가림막과 받침대를 세우면서까지 전시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친일매국 행각을 벌이는 윤석열 정권이 계속되는 한 전국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석각 전시와 관련한 카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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