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수는 “지춘란을 나에게 소개해 준 최만리 사회대중당 여성위원장은 5.16쿠데타로 구속된 후 서울구치소 여사(女舍)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만리는 구속된 사회당 출신 여성 당원들과도 언니,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내가 알기론 그들 대부분은 해방공간에서 여맹 활동을 한 출신이라, 친밀성뿐만 아니라 동지로 더욱더 뭉쳤다. 특히 4월혁명 공간의 여러 집회에도 함께 행동하며 사회당 당사뿐 아니라 밖에서도 만났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황금수는 “사회대중당 이성재 선생, 최만리 선생 등 몇몇 분이 늘 서울역 앞에 있는 사회당 사무실에 자주 방문하고, 사회당과 사회대중당이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자주 접촉했다. 사회당에서는 최백근 선생이 주로 그 양반들을 만나서 서로 대담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짐작건대 최만리는 4월혁명 공간 사회당과 사회대중당 통합을 위해, 사회대중당 이성재 집행위원과 함께 사회당을 자주 방문하면서 자연히 여성 당원과의 교류도 빈번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뿐 아니라 최만리와 사회당 여성 당원들은 5.16쿠데타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 여사에서 함께 옥살이하면서, 끈끈해진 동지애로 서로를 격려하고 통일 조국의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최만리는 5.16쿠데타로 구속된 사회당 최춘자(최정윤)로부터, 대구에서 황금수의 누이 황임순과 해방공간 여맹에서 함께 활동한 것이랑 황임순과 황금수가 오누이 사이란 것도 들었을 것이다.
최춘자와 황임순이 여맹에서 함께 활동했던 대구는 해방공간에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곳이다.
황금수 누이 황임순, 대구형무소에서 학살당한다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대구는 그 어느 곳보다 혁명의 열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만큼 희생도 컸다.
황금수의 누이 황임순 또한 특무대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
황금수의 증언이다.
“특무대에서 나를 검거하러 왔는데, 나는 그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거를 미리 보고. 뒷집이 연결되어 있어 2층 다락에 기어들어 가 숨었는데 그들은 내가 없으니까, 내 누이를 잡아갔어. 이미 특무대는 나를 잡으러 집에 들어올 때, 우리 집 내력을 알고 있었던 거야. 누이는 그때 여맹 활동을 하다가, 징역을 조금 살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때였거든. 그리고 나도 그 후에 약 보름 후에 검거돼. 계엄 하(下)였기에 형무소에 들어간 누이 소식은 알 수가 없었어.
당시 형무소는 면회를 시켜주질 않아서, 누이 소식을 알 수 없어 궁금했는데, 나중에 면회가 되어 내 형하고 형수가 면회 와서 누이 면회 신청을 했더니 마산으로 이감을 갔다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내가 마산 이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그때 다 죽였다고. 누이도 아마 죽었을 거라고. 나 대신에 누이가 잡혀가 아무 잘못 없이 죽은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나는 적개심으로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반드시 살아 나가 누이의 몫까지 대신해 싸우겠다고 다짐했어요.”
당시 황금수가 대구형무소에서 겪은 폭행과 학살 소문이다.
“그때 전쟁 시기이다 보니 중범죄자는 미리 죽였고, 나처럼 살아남은 자는 낙동강 전선이 대치 무렵 간수가 무작위로 번호를 부르면 대답하고 나가야 해요. 나가면 손을 묶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놈들이 손을, 엄지손가락을 철사로 뺀지 같은 걸로 묶어요. 그럼 아프다고 ‘아’ 소리를 지르면 개머리판으로 막 머리를 내리쳐서, 즉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그리고 머리가 박살 나면서 즉사하면 시체를 들어서 트럭 짐칸에 그냥 실어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또한 전부 다 트럭에 실어 전부 앉게 하고, 거리에서 대중들이 보지 못하게 갑바(필자 : 트럭에 씌우기도 하는 천막용 천)를 덮고 헌병이 한 4명 정도 무장하고 타요. 그리고는 가창 중석광산 아주 깊은 탄광에 총을 쏴서 죽여서 그 안에 다 밀어 넣었다는 그런 소문을 형무소 안에서 들었어요.
그때 대구형무소에 붙들려 갔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학살을 당했어요. 누구를 먼저 불러 죽이고, 뒤에 불러 죽이고, 이런 것도 아니고 무작위로 이름 대신 번호를 막 불러 가지고 학살을 했어요.”
대구의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황금수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대구역사문화대전의 ‘대구의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과 피학살자유족회’ 자료이다.
“1950년 6월 당시 대구형무소 수감자는 8,026명이었다. 대구형무소 수감자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3분의 2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상범이었다.
대구형무소의 사상범은 10월항쟁, 대구 6연대 사건, 국민보도연맹 등의 대규모 사건을 비롯하여 개별 사건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10월항쟁의 경우 군정 당국에 의하여 1946년 10월 2일부터 11월 말 사이에 대구와 인근에서 2,000여 명, 경북에서 7,500명의 좌익계 정당·사회단체 관련자,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 하층민, 부랑자 등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사람 중 6,500명은 1947년 1월 말까지 석방되었고, 280명은 특별군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으며, 640여 명은 조사 중이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었다. (중략)
대구형무소의 수감자가 특무대 헌병과 경찰에 인계될 때, 수감자 신병 인계 영수증은커녕 최소한의 구비 서류도 없이 단지 인도 신분증만 작성되었다. 그마저도 1950년 8월에 대구형무소 측은 전쟁으로 인한 형무소 철수를 예정한 상사의 명령에 소각하였다. 따라서 군경이 인도한 대구형무소 수감자의 전체 명단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대구형무소 수감자로서 군경에 인계된 1,402명의 대부분은 경산 코발트 광산과 대구 인근의 달성군 가창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창에서 자행된 학살 행위는 헌병과 경찰의 경계 속에 특경대가 실행하였다.
대구형무소 미기결수에 대한 학살은 30명을 한 줄로 묶어 세우고 헌병 장교가 피학살자에게 마지막 발언 기회를 준 뒤에 특경대의 총격, 헌병 장교의 확인, 집단 매장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특경대의 총격 직전 피학살 군중 속에서 1949년에 남인수가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달도 하나, 해도 하나」라는 노래가 나지막이 울려 나와 가창골을 메아리쳤다.
그런데 대구형무소 수감자 학살은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8월에 대구형무소에서 진주형무소로 이감된 미결수 300여 명이 삼천포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거나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수감자 1,404명 중 1,172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조사반의 지시로 1960년 6월 3일부터 경북도청 사회과에서 유족의 신고를 받았다. 신고된 수는 4,000여 건에 달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 어느 지역보다 의식이 높아 10월인민항쟁으로 남달리 희생이 많았다.
집단학살은 이미 대구 10월인민항쟁부터 시작됐다
대구·경북지역은 학살로 집안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에 특히 황보가(家)는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경북 영천 화북면 구전동(현 화남면 구전리), 당시 대지주였던 황보집은 집안사람들과 함께 영천의 10월인민시위를 주도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황보집은 실종됐고, 황보씨 사람들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동네 전체가 ‘좌익 마을’로 매도당했다.
황보집은 대구의 대표적 좌익계 신문인 민성일보 편집장과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의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황보집의 고명딸 ‘황보희’는 학교에 다닐 때 민주학생연맹에서 활동했다. 아버지는 학생운동 활동과 집안 배경이 드러나면 위험하니, 신분을 숨기고 ‘박춘자’로 살아가라고 하여 이후 ‘박춘자’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한다.
필자는 과거 경북대학교에서 개최된 ‘4.9인혁열사 추모제’에서 남민전 이재문 총서기의 부인 김재원 여사와 황보희가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0월인민항쟁의 원인은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등 켜켜이 쌓인 농민들의 분노가 봉기의 기폭제가 됐다. 경북 22개 군 가운데 대부분 지역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1949년 발간된 『조선중앙연감』을 바탕으로 정해구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 시위와 봉기에 참여한 연인원은 77만 3천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 8천 명의 24%에 달했다.
이후 6.25전쟁으로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6.25전쟁 전후 이남 지역에서 진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은 국방군·경찰과 반공 극우단체 그리고 미군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전쟁 초기 집단학살은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사상범으로 규모가 제일 컸다. 그리고 전쟁 이후 집단학살은 인민군 미점령 지역인 대구를 포함한 낙동강 전선 이남 지역인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뿐 아니라 빨치산 근거지 부근 주민 또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광범위하게 학살을 당했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이승만 사대 노예 독재가 무너지자, 곳곳에서 6.25전쟁 전후 집단학살의 진상규명 운동이 대표적 대중운동으로 분출되었다. 그동안 숨죽였던 피학살 유족들의 억눌렸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53년 7월 6.25전쟁이 정전된 후 7년 만에 이승만이 하야하자, 시신도 수습 못 한 유족들은 불과 14일 뒤인 5월 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박영보 면장을 타살하고 불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박영보는 거창사건 때 국방군에게 많은 무고한 주민들을 ‘빨갱이’로 지목해 그들을 무참히 죽게 했다는 이유로 유족들에게 원한의 표적이 되었던 자이다.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7일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작전명령 제207호,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중 주민을 통비분자로 간주해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이때 700여 민간인이 국방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4.19혁명과 전국피학살자유족회 결성
1960년 5월 23일 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1960년 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 영호남 지역의 학살 현장을 조사하여 6월 21일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국회 본회의에 제출하였다.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 전신)의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한길사, 1990)에 나오는 국회 조사반 보고서 내용이다.
“조사반은 6월 21일 본회의에 경남의 거창, 거제, 함양, 동래, 울산, 충무, 구포, 마산, 산청군과 경북의 대구시(현지 신고), 문경군, 전남 함평군, 그리고 전북 순창군(현지 신고)에서 8,715명의 인명피해와 가옥피해 10,041호 등이 있었다는 보고서를 내고 행정부에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에 의한 조속한 진상조사와 일사부재리 원칙과 시효의 저촉 규정에 관계없는 특별법으로 ‘양민학살사건처리특별조사법’ 제정을 촉구하는 건의안을 보내는 것으로 활동의 막을 내렸다.”
보고서 내용을 지역별로 구분하면 경남지역 3,085명, 경북 대구 등 2,200명, 전남 함평 524명, 전북 순창 1,028명, 제주도 1,878명 등 총 8,715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조사되지만, 학살의 주체였던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 12명이나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투명한 진상규명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이에 피학살자 유족들은 지역별로 유족회를 결성하고, 대중운동으로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먼저 경상도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대구가 5월 30일 ‘경북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원회’를 제일 먼저 결성하면서 주도했다. 이어서 6월 15일에 대구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경북피학살자유족회(경북유족회)’ 결성대회를 개최한다.
경북유족회는 선언문을 통하여 “우리들은 민주 건국 발전사상에 있어 유례없는 오점과 반민족적 죄과를 범한 동족 대학살에 희생된 원혼의 유가족들에 의하여 조직된 피의 결합체”로 규정했다. 그리고 당면 과업으로 ① 헌법에 규정된 기본 인권 보장, ② 예방 학살의 정치 도의 확립, ③ 학살 피해에 대한 국가 형사보상, ④ 합법적 절차를 통하여 관련자에 대한 집단 고발 및 처단, ⑤ 피학살자 원혼탑 건립, ⑥ 불법적 반민족 현상에 대한 비판 시정 등을 삼부에 건의·요구하고 전 동포들에게 학살과 대결하는 국민운동 전개 등을 제시하였다.
이후 8월 18일 경남유족회 등 도 단위 조직이 먼저 결성되고, 마침내 10월 10일 서울에서 전국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 명이 모여 ‘전국피학살자유족회(전국유족회)’가 결성된다.
전국유족회 결성대회 결의문 일부이다.
“전국피학살자유족회는 이승만 폭정배가 저지른 바 세계 인류 사상에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대량적 동족 학살 행위에 희생이 된 원혼의 유족들로서 조직된 피의 결합체입니다.
해방이 되고 신정부가 수립된 이 나라에서 이승만 독재와 그의 도당들은 민주주의와 법치국가를 운위하면서 종생 이 땅에서 일인 독재를 자행하고자 저 해괴한 이승만식 반공의 미명에 숨어 만고 법전의 그 어느 조문에도 해당시킬 수 없는 억울한 죄명을 씌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고한 양민을 수없이 집단학살 시키고 말았다.
부모, 형제, 최애(最愛)의 남편, 처자들로 하여 제 손으로 죽어 묻힐 굴을 파게 하여 죽이고 산 사람을 생선처럼 엮어서 대해에 수장시킨 하수인들이 지금도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달(榮達) 횡행(橫行) 천지하고 있는 저주받을 사실을 통탄만 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엄중히 의법 처단치 않고서야 만고의 한을 풀 길이 없어 오늘도 조국의 허공을 떼 지어 호곡(呼哭)하고 있을 원혼들에 대하여 위령하는 방법이 있어야겠다.
기본 인권이 헌법에 보장되었다면 위정자가 함부로 죄 없는 양민을 학살시킨 이 죄악에 대하여 국가는 마땅히 불법을 사죄하고 의법 보상으로 명분을 세워야 옳은 일이거늘 방방곡곡에서 속출되는 엄연한 사실에 대하여 함구무언하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음은 지극히 유감된 일이다.”
무덤도 흔적도 없는 원혼들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전국유족회는 1961년 2월, 24명의 민의원을 통하여 정부에 질의서를 제출하여 정부의 명확한 답변과 대책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등 그 활동이 활발했다.
전국유족회운동은 외형상 피학살자 명예회복과 학살자 처벌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사실상 이승만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이승만 단독정부를 부정하고 협력한 민주당을 포함한 지배세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특히 이 운동이 대부분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절대 빈곤 상태에 있던 농민의 저항이라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피학살자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관련자들은 이후 체포되어 혁명검찰부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는다.
필자는 사월혁명회 사무국장 시절 연대사업으로 4월혁명 공간 창립한 전국유족회 후신인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정책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때 대구·경북지역에 대해 많은 증언과 사연을 듣게 되었는데, 특히 여성으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구·경북지역은 희생이 많다 보니 과부가 많았고, 남편의 신원(伸寃)과 진실규명을 위해 온 생을 바쳐 활동한 열녀들도 많았다.
그중 남편의 신원(伸寃)과 진실규명을 위해 온 생을 바쳐 활동한 최찬 여사를 알게 되었다. 최찬 여사의 부군 김진하는 1949년 8월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수감 중 1950년 7월 가창골에서 학살당했다. 그녀는 4월혁명 공간에서 이원식, 이복녕 선생과 함께 대구지구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가창골에서 학살된 수많은 주검을 발굴하여 여성들의 치마에 싸서 산 위에 가매장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5.16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녀는 과부로 부군 김진하의 신원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필자가 정책위원으로 활동할 때, 유족들이 전해준 전국유족회 회가(會歌)를 잊을 수 없다.
대구지구피학살자 유족 대표 이원식이 작사하고 권태호가 작곡한 전국유족회 결성대회에서 채택된 회가 「맹서하는 깃빨」 가사이다.
“사나운 바람 불어 이 마음 쏘고 외치는 분노의 피 물결치면서 자장가도 구슬픈 추억이 아 – 새하얀 밤을 흐르고 있네 가자 대열아 피를 마시고 자라 난 우리는 피학살자의 아들 딸이다.
민족의 원수들 손에 무참히 죽어 간 님들의 이름은 자유의 벗 빛나는 역사 태양과 함께 돌꽃이 되어서 피게 하소서 가자 검은 기 맹서하는 깃빨 우리는 피학살자의 아내들이다.
무덤도 흔적도 없는 원혼들이여 천년을 두고 두고 울어 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가자 서로가 아는 것이 큰 힘 우리는 피학살자의 부모들이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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