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정문일침313] 김일성 주석 항일전법으로 본 괌포위사격 전망

중국시민 | 기사입력 2017/08/11 [14:43]

[정문일침313] 김일성 주석 항일전법으로 본 괌포위사격 전망

중국시민 | 입력 : 2017/08/11 [14:43]
▲ 연변박물관의 항일무장투쟁 모형,1930년대 초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반일·항일무장유격대원들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겨울 백두대지에 집을 덮을 정도로 쌓인 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간고한 전투를 벌였다. 그 기간에 김일성 부대는 영활한 전법으로 일본 관동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는데 이때 적용한 전법을 북에서는 주체전법이라고 해서 한국전쟁 기간에도 응용했고 지금도 응용하여 미국과 대결전을 펴고 있는 중이다. ©이용섭 역사연구가

 

8월 8일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대변인성명으로 《화성-12》형의 괌도주변 포위사격 작전방안을 심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고, 9일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관 김락겸 대장이  《화성-12》형 4발이 일본의 시마네현, 히로시마현, 고찌현 상공을 통과하면서 사거리 3,356.7㎞를 1,065s간 비행한 후 괌도주변 30~40㎞ 해상수역에 탄착되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 다음, 숱한 정치인과 전문가, 그리고 네티즌들이 언론과 인터넷을 빌어 견해를 발표했다. 

 

그중에서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이미지론이 무척 우스웠다. 북이 괌 포위사격를 예고한 이상 실시하지 않으면 지도자로서의 김정은 이미지에 흠이 감으로 어쩌고어쩌고 하던데, 조선(북한)이 로켓(한국식으로는 미사일)을 꼭 발사하고 미국이 요격하거나 북을 폭격하여 사태가 커지기를 바라는 속내가 내비친다. 

 

사실 전략군 대변인은 괌도포위사격방안의 심중한 검토를 얘기했고 사령관은 “8월 중순까지 괌도포위사격방안을 최종완성”하여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보고해서 “발사대기태세에서 명령을 기다”리겠다고 예고했다. 이런 발언들은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다. 조선은 한, 미, 일이 곧잘 떠드는 “기습발사”를 꽤나 많이 했는데 괌도포위사격 역시 얼마든지 예고 없이 기습발사할 수 있건만, 사격방안이 최종완성되지 않은 상황(적어도 그렇게 공포했다)에서 그런 방안의 존재를 공개한 데는 당연히 나름 계산이 있지 않겠는가. 

 

조선이 괌사격방안존재를 공개한 행동을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괌포위사격이 이미 확정된 것처럼 해석하면서 이미지론을 펼치고 어떤 언론들이 열흘 뒤 사격이 이뤄지느냐를 떠들기에 필자는 글을 좀 쓸 충동을 누를 수 없었다. 그 이미지론에서 트럼프의 이미지도 언급했으나 그건 다루지 않기로 한다. 트럼프에 대해서는 글과 말들이 너무 많으니까. 

 

조선이 어떤 타격방안의 존재를 밝히는 정도가 아니라, 어디를 언제 타격하겠다고 선언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은 영원히 50%이다. 말해놓고 실시하지 않더라도 지도자의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는 건 한국인다운 추측에 불과하다. 김일성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사를 아는 사람들로서는 한국 전문가들의 무지가 놀라울 수밖에 없다. 김일성 장군의 항일전투이야기들을 어릴 적부터 보고 듣는 조선사람들이나 개인적인 흥취 혹은 직업적인 이유로 김일성 장군의 항일전법을 연구한 외부사람들은 조선이 무슨 큰 일을 하겠다고 선언할 때 아마도 1938년 봄에 벌어진 6도구 전투의 특징을 떠올릴 것이다. 

 

▲ 항일무장투쟁 시기 김일성 주석 부부     ©자주민보

 

자료접촉의 한계 때문에 어떤 한국인들이나 재미동포들은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만 보았으므로 6도구 전투를 잘 모를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그 전투를 구체적으로 쓰지 못했으므로 구술자료들을 정리한 “계승본”인 8권에 하고 일부 회억이 남아있다. “제23장 국제반제력량과 단합하여”의 “신념과 배신”이란 꼭지에서 참모장이었다가 변절한 임수산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내용이다. 

 

“1938년 봄 한달사이에 우리가 6도구전투를 두번 했는데 왜 두번했는가.

첫 전투를 림수산이 지휘하였으나 다 이긴 전투를 망쳐놓았습니다.

6도구는 1,000여호의 집들이 밀집되여있는 큰 성시였습니다. 

……

이 전투가 있은 다음 적들은 유격대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인민들이 그 선전을 듣고는 누구나 어깨를 떨구고 다녔습니다. 림수산의 오유로 해서 첫 6도구전투는 이처럼 인민혁명군의 권위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나는 6도구전투를 다시 조직하였습니다. 부대를 이끌고 성시로 쳐들어가 6도구를 단숨에 점령했습니다. 적들은 유격대의 공격을 격퇴했다는 선전을 더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항일투사 전문섭과 이을설의 회억에는 6도구 전투가 보다 상세하게 소개되었다. 전문섭이 쓴 《천출명장》(조선로동당출판사 1999년 10월)에서는 김일성 장군이 6도구 전투를 다시 진행한 다른 중요한 목적도 밝혔다. 

 

“당시 이 일대의 산림속에는 반일부대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혁명과 반혁명사이에서 동요하면서 혁명정세가 유리할 때에는 혁명의 편에 서거나 무장을 가지고 혁명군에 편입되기도 하였지만 혁명정세가 불리할 때에는 적에게 투항하군하였다. 

*** ***께서는 이 일대에 있는 반일부대들을 설복하여 그들과 련합해서 적의 <토벌>거점의 하나인 6도구를 침으로써 반일부대 병사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고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더욱 힘있게 조직동원하시려는것이였다. ”(123~124쪽)

 

6도구는 임강현과 장백현을 연결하는 대도로에 위치한 성시로서 4개의 대문과 2개의 포대를 갖춘 견고한 성벽이 시가를 둘러쌌고 주위에는 응원할 부대들도 많았다. 방어에 유리하고 공격에는 불리한 전투를 꼭 이겨야 했다는데 전투의 어려움이 있었다. 

 

김일성 장군은 여러 차례 정찰을 조직하고 거듭 사색하다가 적들에게 통고장을 보냈다. 아무 날에 6도구로 쳐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적군은 바싹 긴장해나 인근에서 응원부대들을 끌어다가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예고한 날짜에 유격대와 반일부대들은 출동하지 않았다. 무사히 고비를 넘기니 수비군들은 긴장이 좀 풀렸다. 

김일성 장군은 또다시 공격통고장을 보냈다. 적군은 재차 긴장해나 며칠을 들볶았으나 이번에도 공격은 발동되지 않았다. 응원부대들은 되돌아갔고 수비군들도 탕개가 풀려 맥을 놓았다. 

 

김일성 장군은 곧 7연대와 8연대를 이끌어 출동하면서 부근에서 활동하던 문병군 부대 등 반일부대들도 불러 모아 야밤에 6도구를 들이쳤다. 공격은 순조롭게 승리했고 항일부대들은 6도구를 5시간 차지하면서 전투 및 선전을 했고 밥까지 지어먹었다. 부근에 있던 괴뢰만주국 군대는 6도구가 녹아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감히 출동하지 못했으니, 이는 유격대의 방어대가 길목을 지키고 응원부대를 기다릴 걸 알아서였다. 

 

앞의 2차례 통고를 김일성 장군이 지키지 않았다 해서 항일유격대나 반일부대 내부에서의 김일성 이미지가 약화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손실이 적고 수확이 큰 승전으로 김일성 장군 숭배자들이 아군, 인민 지어 적군들 가운데서 더 늘어났다. 

 

총에만 의지하지 않고 말과 글을 충분히 활용하는 건 김일성 장군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전해내려온 조선의 전통이다. 그리고 6도구 전투는 임수산과 반일부대 등 요소로 하여 시간에 쫓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조선의 편에 있다. 말 그대로 “임의의 시각”에 공격하느냐 마느냐를 정하는 여유가 있다. 괌으로 로켓(미사일)을 날리든 말든 조선사람들이 보는 김정은 이미지가 흐려질 가능성은 0. 00000001%쯤 되겠다. 0이라 단언하지 않는 건 조선이 근년에 밝혀오다시피 변질하여 미국이나 한국을 좋아하는 조선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화성 12”형이 날지 않고 “위기설”이 난무하는 8월이 무사히 지나가면 일부 한국 전문가와 언론들이 그 무슨 내막과 진실 및 비하인드 스토리를 엮어낼 게 뻔하다. 미국의 강경대응에 겁을 먹었다, 중국이 압력을 가했다, 워낙부터 허풍(함경도 사투리로는 “꽝포”라던가)이었는데 승리로 둔갑시킨다.... 

 

영양가가 없는 추측과 소설들이 전문가들과 기자들이야 먹여살린다만, 반도와 주변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함은 눈이 바로 박힌 사람들은 다 알리라. 그런 전문가와 기자들 또한 바보가 아닌 이상 요즘 밤에 소주를 마시고야 잠이 들지 않을까?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중국시민의 정문일침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