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반을 넘어가며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이대로 북미 협상 없이 2020년을 맞을 것인지, 미국은 끝내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을 것인지, 그리하여 북한이 스스로 공언한 것처럼 ‘새로운 길’로 갈 것인지 다들 주목하고 있다. 이 와중에 북한이 공개한 모종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미국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이에 요즘 나타난 북한과 미국의 행태에 대해 배경과 의미를 분석해 내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해보고자 한다.
1. 요즘 나타난 북한과 미국의 행태
(1) 북한
북한은 미국을 향해 ‘모종의 시험’과 함께 여러 공개 발언을 통해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먼저 북한은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지난 7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모종의 시험을 하였다. 두 시험의 결과를 북한 국방과학원 대변인이 발표했다. 첫 시험에 대해 “대단히 중대한 시험이 진행되었다”, “중대한 시험의 결과는 머지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략적 지위를 또 한번 변화시키는데서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 시험에 대해서는 “13일 22시 41분부터 48분까지 서해위성발사장에서는 중대한 시험이 또다시 진행되었다”면서 “최근에 우리가 연이어 이룩하고 있는 국방과학연구성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믿음직한 전략적 핵전쟁억제력을 더한층 강화하는데 적용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전문가들은 7분이라는 시험 시간과 서해위성발사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이번 시험이 로켓 엔진 연소 시험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북한이 더 이상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어떤 시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략적 지위’, ‘전략적 핵전쟁억제력’과 직결된 ‘중대한’ 시험임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을 위협하는 군사적 행동이며, 2020년 ‘새로운 길’에서 실체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점도 예측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박정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은 14일 담화를 통해 “최근에 진행한 국방과학연구시험의 귀중한 자료들과 경험 그리고 새로운 기술들은 미국의 핵위협을 확고하고도 믿음직하게 견제, 제압하기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또 다른 전략무기개발에 그대로 적용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미국을 겨냥한 시험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힘의 균형이 철저히 보장되어야 진정한 평화를 지키고 우리의 발전과 앞날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적대세력들의 정치적 도발과 군사적 도발에도 다 대비할 수 있게 준비되어있어야 하며 대화도, 대결도 낯설어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북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된다고 해서 결코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음을 강조했다.
미국을 겨냥한 시험과 함께 북한의 주요 대미 협상 관계자들의 발언도 잇따랐다. 리태성 외무성 미국담당 부상 담화(3일), 박정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담화(4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담화(5일), 김성 유엔주재 대사 성명(7일),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담화(9일), 리수용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담화(9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12일) 등이다. 내용을 종합해보면 북한의 대미 입장을 알 수 있다.
먼저 미국에 제시한 연말 시한이 유효함을 강조한다. 이는 내년에 곧바로 새로운 길로 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미국이 북한의 요구인 ‘새로운 계산법’을 마련하지 않고 북미 관계를 내년 대선에 써먹기 위해 시간끌기를 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초조하고 겁을 먹었다고도 분석했다.
다음으로 북한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앞으로도 계속 인내하지는 않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북미 정상 사이의 친분관계가 현 북미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인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정중하지 않은 표현을 한 것에 주목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막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미국이 놀랄 일이 생기며 안전위협을 갈수록 크게 느낄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대화와 대결 모두 준비되어 있음을 밝혔다. 또한 미국이 대북적대정책을 철회하지 않아 점점 ‘새로운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도 하였다.
정리하자면 북한은 어떤 상황에도 준비되어 있으며 대화를 할 수도, 대결을 할 수도 있다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2) 미국
미국의 입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3일 런던에서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 회담을 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로켓 쏘아올리기를 좋아한다”면서 부적절한 비유를 하였다. 이에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이 우려를 표하자 “우리는 매우 좋은 관계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면서 마치 북한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한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미군을) 사용하길 원치 않지만 써야 한다면 쓸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가 북한 책임이라고 여기며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입장임을 보여준다. 북한이 요구한 ‘새로운 계산법’이나 대북제재 해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7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적대적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라며 북한이 자제하기를 기대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트윗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적대적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은 전면전을 통해 초토화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조금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전쟁 위기가 치솟던 2017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다.
실제로 그레이엄 앨리슨 미 하버드대 교수는 12일 “제2차 한국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같은 날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면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군사적 행동도 배제 못한다”고 하였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 트윗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북한은 엄청난 경제적 잠재력이 있으나, 약속한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에도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번영할 것이다’는 내용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말을 ‘북한이 비핵화를 먼저 하면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주겠다’로 해석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해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주겠다’는 확언은 없다. 굳이 해석하자면 ‘비핵화를 하면 경제 지원을 할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전형적인 사기꾼 어법이다.
국무부의 태도도 살펴보자.
유럽 일부 나라들이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인 12월 10일에 맞춰 북한 인권 관련 안보리 회의를 요구했는데 미국이 이를 거부했다. 11월 14일 유엔총회 3위원회에서 북한 인권 결의를 채택한 것을 두고 북한이 강력 반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은 12월 11일 북한 미사일 문제를 다루는 안보리 회의를 소집해 북한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곧바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발표해 “미국은 이번 회의소집을 계기로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였으며 우리로 하여금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명백한 결심을 내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인권회의를 거부했으니 미사일회의는 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대북적대정책을 고수하는 이상 북미 협상이나 북미 관계 발전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판문점에서 북한과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 겸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는 16일 기자 브리핑을 열고 “우리는 시한이 없다. 일할 시간이다. 일을 끝내자”라며 북한에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북한은 호응하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미국은 대북제재를 유지하고 군사적 위협도 유지하는 등 대북적대정책을 계속 가져가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대화를 하자고 요구한다. 또 북한이 ‘도발’을 하면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입장도 보였다.
2. 양측 주장의 합리성 분석
북미 양측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면 자신도 상응하는 행동을 하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미국의 주장은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재개하면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 ▲북한이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유지하면 협상을 계속 하겠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경제적 혜택을 생각해보겠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면 북한의 주장은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등을 하지 않으면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유지하겠다 ▲미국이 안전보장이라는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면 협상을 하겠다 ▲미국이 대북적대정책을 유지하면 ‘새로운 길’로 가겠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주장들의 합리성을 살펴보자.
(1) 미국의 주장
미국의 주장에는 북한에 요구하는 것만 있고 자신이 뭘 해주겠다는 게 없다.
먼저, 협상을 계속 한다는 건 북한에 양보하는 것도 아니고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다. 협상을 계속 하는 건 북한의 추가 군사행동을 막고자 하는 미국에 필요한 것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외교 성과를 홍보해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북한이 추가 군사행동을 하지 않고 협상을 계속하는 건 매우 절실한 문제다.
경제적 혜택이나 번영에 대한 언급도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한번 고려해보겠다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요구조건은 비핵화다. 즉, 상대방에게는 사실상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은 그에 대한 보상을 할지 말지 생각해보겠다는 것이다. 이건 현찰 받고 어음 주는 격, 아니 어음을 줄 수도 있다는 말만 하는 격이다. 등가성도 없고 사기성만 농후하다. 리비아의 경우 핵프로그램 폐기하면 경제지원 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믿고 핵프로그램 폐기했다가 약속한 경제지원은 거의 받지도 못하고 내전을 빙자한 미국의 공격에 무너졌다. 경제지원을 확약해도 이정도인데 확약도 아니고 언급 정도만 하면서 비핵화를 요구하는 건 거의 사기라고 봐야 한다.
그러면서 핵·미사일 활동을 재개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며 전면전을 경고한다. 미국의 행태는 제3자가 봐도 일방적이고 패권적이며 사기성이 짙다.
(2) 북한의 주장
가. 한미연합훈련 중단 대 핵·미사일 모라토리엄 유지
먼저,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등을 하지 않으면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유지하겠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이 내용은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미 지난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이다. 물론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과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구두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지난 7월 16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외무성 대변인은 6월 30일 리용호 외무상, 폼페이오 국무부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열린 판문점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구두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부인하지 않아 사실상 약속을 인정했다.
이런 미국의 약속에 기반하여 지난해 9월 남북은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으며 “상대방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 및 무력증강 문제”를 계속 협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약속을 깨고 한미연합훈련을 이름만 바꿔서 계속 진행했으며 한국에 F-35를 비롯한 최신 무기를 수출하였다. 반면 북한은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계속 지키고 있다. 물론 올해 들어와서 단거리미사일 발사를 하기는 했지만 북한이 말한 미사일 모라토리엄은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대한 것이므로 약속 위반이라고 할 수 없다. 대북강경파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조차 8월 1일 인터뷰에서 “(단거리 미사일 발사가) 약속 위반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북미 사이의 약속을 미국은 지키지 않고 북한만 그동안 지켜왔다. 북한이 인내심을 발휘한 것일 수도 있고 힘이 약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만약 미국이 연말 시한까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적대정책을 유지했을 때 북한이 ‘새로운 길’로 간다면 지금 참고 있는 게 힘이 없어 참은 게 아니라 인내심을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입장은 내년에 입증된다.
물론 지금 상황을 보면 북한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내하고 있다고 여길 개연성이 있다. 북한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자 미국이 후퇴 끝에 결국 훈련을 중단한 것만 봐도 주도권이 북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북한의 위 주장은 상호 약속을 계속 지키자는 것으로 합리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나. 안전보장 대 비핵화
다음으로, 미국이 안전보장이라는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면 비핵화 협상을 하겠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북한의 주장은 미국이 핵무기로 자신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핵무장을 하였고 따라서 미국이 안전보장을 하면 비핵화를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논리의 타당성 여부를 밝히자면 사실관계부터 따져야 한다.
1946년 제정된 현행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은 선제핵공격 권한을 가지고 있다. 2017년 미 의회에서 선제 핵공격 권한을 손질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이런 권한을 토대로 미국은 오래전부터 선제핵공격 계획을 수립,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준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 트루먼 미 대통령은 백악관에 각 군 참모총장을 모아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여기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참전 시 소련의 개입 가능성에 대비해 소련 극동 기지들에 핵폭격을 할 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로저 딩맨, 「한국전쟁 시기 원자외교(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13권 50-91쪽, MIT 출판사, 1988.) 한국전쟁에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구상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기밀해제된 1급 문서들에 따르면 맥아더 사령관은 전쟁 초기부터 핵폭탄 사용 허가를 요청했다고 한다. 1950년 11월 28일 랄로 합동참모본부 국장은 “사용할 수 있는 원자폭탄의 숫자와 표적지, 수송 등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을 검토해달라”고 합동전략조사위원회에 요청했고 다음날 조사위는 “(핵무기 사용) 결심은 최고위층이 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핵폭탄 사용을 항상 검토하고 있다”고 공개해 북한을 위협했다.
1951년 2월 11일 맥아더 사령관은 “적의 주요 보급로에 방사능 폐기물을 설치해서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영원히 분리하겠다”고 주장했고 4월에는 트루먼 대통령이 마크-4 핵폭탄 9기의 괌 이전을 승인하고 핵폭탄 사용 명령서에 서명했다. 이 해 9, 10월에는 평양 상공에서 B-29 폭격기를 동원한 핵폭탄 투하 훈련을 진행했다.
1953년 초 국방부는 “빠른 시일 내에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핵폭탄 사용이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5~7월에는 미 공군이 “정전협상이 결렬될 경우 북한에 핵공격을 가할 준비를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미군은 1954년 5월을 핵공격 D-데이로 설정했지만 그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핵공격을 취소하였다.
정전 후에도 미국은 핵공격 위협을 계속했다. 1953년 8월 20일 전략공군사령부는 공군사령부에 ‘전쟁이 재개되면 중국, 만주, 북한에 대량의 핵폭격을 할 것’이란 내용이 담긴 작전계획 8-53을 보냈다. 1956년 1월 6일 국무부·국방부 합동회의에서 테일러 육군참모총장은 “한국에 핵배치할 수도 있다”고 하였고 실제로 1957년 말 혹은 1958년 초부터 주한미군에 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중립국감독위원회 감시위원을 추방하고 정전협정 2조 13항(무기반입 금지조항) 폐기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최대 1000여 기에 달하는 다량의 전술핵무기가 한국에 배치됐다.
미국은 한국에 배치한 핵무기를 종종 사용하고자 시도했다.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발하자 곧바로 여단, 사단 규모의 핵야포훈련을 실시했다. 1969년 4월 15일 전자정찰기 EC-121 격추사건이 발생하자 멜빈 레어드 미 국방장관은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핵무기를 탑재한 전술폭격기들이 북한 공습에 나서기 위해 15분 째 비상대기 중”이라고 보고했다.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뜻을 종종 밝혔다.
1975년 7월 포드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 발발시) 재래식 전쟁에서도 핵병기를 사용할 것이다”고 하였고 1976년 2월 9일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한국에서 유사시에는 핵병기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977년 카터 대통령은 “핵병기가 배치되어 있는 지역에는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필요하면 핵병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1981년 8월 11일 윌즈 미 국방성 대변인은 “중성자탄을 사용할 가능성은 유럽보다는 극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983년 1월 23일 에드워드 마이어 미 육군참모총장은 “한국에 배치된 핵미사일 발사 여부의 기본적 판단과 권리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그 판단과 결정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된다”라며 주한미군의 핵무기 사용이 용이함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북한을 핵으로 위협했다.
미국의 작전계획에도 선제핵공격이 담겨있다.
핵전쟁 계획은 기본적으로 미 전략사령부가 작성한다. 전략사령부의 단일통합작전계획(SIOP) 1999년판에는 선제핵공격 목표지점에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가 추가되었다. 2003년 작성된 개념계획 8022에는 북한, 이란의 임박한 위협에 대처해 벙커버스터에 탑재된 전술핵무기와 컴퓨터 바이러스, 전파방해를 이용한 선제공격 내용이 담겼다. 이 계획은 2004년에 폐기됐다. 2003년 작성된 작전계획 8044에도 대북 핵전쟁 시나리오가 들어있다. 2008년 작성된 작전계획 8010-08에는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시리아, 테러집단에 대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이용한 선제공격 계획이 담겨있다. 한편 전략사령부가 아닌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 9518에도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이용한 공격계획이 들어있다.
미국은 선제핵전쟁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한미연합훈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한미연합훈련에는 핵폭격기 탑재한 항공모함, 핵잠수함, B-2·B-52 등 핵폭격기가 참여한다. 한미연합훈련이 핵전쟁훈련인 다른 이유도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핵무기를 제때 사용하지 못한 점을 꼽았고 이에 따라 적극적인 핵무기 사용 훈련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75년 전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CSCE)가 출범하면서 유럽에서 1개 사단 이상의 연례훈련이 금지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은 대규모 핵전쟁훈련을 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1976년부터 한국에서 한미연합훈련 팀스피릿을 시작하였다. 이 훈련을 모체로 하여 지금까지 각종 한미연합훈련이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미국의 선제핵공격 위협은 21세기에 와서도 지속되었다. 2002년 미 국방부의 핵태세검토보고서(NPR)는 북한,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에 대한 우발사태시 선제핵공격 계획을 작성했고, 2003년 미 전략사령부가 작성한 전략핵전쟁계획서는 북한, 이란, 리비아에 대한 선제핵공격 계획을 명시했다. 또 2005년 미 합참의장실이 작성한 합동핵작전교리에 따르면 지역 전투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선제핵공격 승인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다. 이 교리는 동아시아에서 제한된 핵전쟁을 하기 위한 비상 시나리오가 있다는 점을 명시했으며 주일미군에 배치된 잠수함들은 필요시 핵탄두를 재장전할 준비를 갖췄다고 하였다.
이처럼 미국의 선제핵공격 위협은 매우 오랜 기간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북한은 이런 미국의 선제핵공격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개발을 했다고 주장한다.
핵위협에는 핵억제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논리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핵개발을 한 이유도 나치 독일의 핵개발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소련도 미국의 핵공격에 대비해 핵개발을 하였고,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영국, 프랑스가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해 핵개발을 하였다. 이처럼 대부분 핵보유국의 핵보유 명분은 핵위협에 맞선 핵억제력 확보였다. 심지어 국내 보수세력도 북한의 핵보유에 맞서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하거나 독자적인 핵개발을 하자고 주장할 정도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국의 선제핵공격 위협을 명분 삼아 사실은 적화통일을 하기 위해 핵개발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 주한미대사인 해리 해리스는 미 태평양사령관 시절인 2018년 2월 14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이 체제 보호를 위해 핵개발했다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한반도 적화통일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전쟁을 할 의도가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이 타당한지 살펴보자.
먼저, 북한의 공식 정책 노선에 적화통일은 없다. 적화통일이란 한국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강제 교체해 체제통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통일 노선은 7.4 남북공동성명에 기초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 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한 ‘우리민족끼리’ 정신과 연합연방제 방식이다. 여기서 연합연방제 방식이란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사회주의 통일, 체제 통일은 없다.
물론 노동당의 최종 목적이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는 것이지만 이는 통일의 조건이 아니라 통일 이후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최종’ 목적이다. 6.15 선언에서 합의한 연합연방제 방식으로 통일을 한다면 당분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공존하게 된다. 두 체제가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게 될지, 아니면 어느 일방의 승리가 아닌 양 체제의 장점만 모은 독특한 체제가 탄생할지는 통일 이후의 문제다. 노동당이 규약에서 밝힌 최종 목적은 통일 이후 있게 될 이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것으로 적화통일과는 관련이 없다. 한국의 정당들도 통일 이후 선의의 경쟁을 통해 승리하겠다는 목표를 당연히 내걸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공식 정책과 노선뿐 아니라 현실에서 보여주는 북한 정부의 모습도 적화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은 핵무력 개발에 완성한 후 이를 이용해 한국을 위협하고 압박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평창올림픽 지지를 밝히고 전면적인 대화와 협상을 제안했다. 북한 핵무기가 남침용, 공격용이 아닌 대화용, 평화용으로 쓰인 것이다. 또 남북정상회담 등의 기회로 생방송으로 직접 본 북한의 모습 어디에서도 남침이나 적화통일을 떠올리게 하는 건 찾을 수 없었고 오로지 평화통일, 평화경제, 평화번영 이런 것들만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게 다 위장이고 뒤에서는 적화통일을 위해 핵무기를 앞세운 선제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제공격 징후가 보인다는 발표는 아직까지 없다. 애초에 미국의 한반도 작전계획이 북한의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예방 차원의 선제공격을 한다는 것이므로 만약 북한의 선제공격 징후가 있었다면 이미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또한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면 미국도 공격을 해 북한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핵전쟁으로 한반도가 초토화된 뒤 통일하는 게 북한으로서 실익이 없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북한의 핵무기가 적화통일용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반면 적화통일용이 아니라는 근거는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북한의 핵개발이 적화통일용이라는 주장은 현실 타당성이 없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핵위협에 맞서 안전보장을 위해 핵무장을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미국이 안전보장을 해야 비핵화를 할 수 있다는 북한의 주장 역시 합리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다. 대북제재 일부 해제 대 영변핵시설 폐기
지금은 무효가 됐지만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대북제재 가운데 민수용을 해제하면 영변핵시설을 폐기하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이 하노이 안의 합리성을 따져 보자.
일단 이 안은 북한이 그간 이야기한 동시적, 병행적, 등가적, 단계적 원칙에 따른 구체적인 제안 중 하나다. 앞서 한미연합훈련 중단 대 핵·미사일 모라토리엄도 이런 원칙에 따른 제안이었다. 하노이 안이 동시적, 병행적, 단계적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는데 등가적인지는 평가하기 쉽지 않다. 대북제재 일부 해제나 영변핵시설 폐기를 금액으로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3월 15일 평양 기자회견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약속 위반시 원 상태로 복귀(스냅백: snap-back)를 전제로 대북제재 완화를 검토하였는데 폼페이오와 볼턴이 만류하였다고 한다. 스냅백 조항을 북한이 제안했는지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정황상 북한이 제안했거나 최소한 동의했음은 분명하다. 북미 양측이 동시 행동을 하되 어느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다른 한쪽도 원상복귀하자는 안은 충분히 합리성이 있다. 게다가 북한의 영변핵시설 폐기는 원상복귀가 힘들지만 미국의 제재완화는 원상복귀가 손쉽기 때문에 이 안은 미국에게 대단히 유리한 안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북한은 미국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평가했다. 크리스토퍼 힐 전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도 3월 10일 미 의회 전문매체 더힐에 기고한 「트럼프를 위한 딜:북의 제안을 수용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라」에서 “영변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플루토늄 생산시설”이라며 북한 제안을 수용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3월 4일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전체회의에서 “영변 핵시설이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진행 과정에 있어서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이처럼 북한의 하노이 안도 충분히 합리성이 있으며 오히려 미국에게 유리한 내용이었다.
3. 미국은 북한의 ‘새로운 길’에 대응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국이 보이는 모습은 합리성을 결여하고 일방적, 패권적인 반면 북한의 모습은 합리성이 있고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인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앞으로 북미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이전 글에서 여러 차례 분석하였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변화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북한이 ‘새로운 길’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미국이 어떻게 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것처럼 전면전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미국은 그간 여러 차례 북한에게 레드라인, 데드라인 같은 금지선을 그었지만 그 때마다 북한은 금지선을 넘었다. 핵실험도, 대륙간탄도미사일도 다 미국의 레드라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도 미국은 공언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장 전쟁을 시작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약한 모습을 반복해서 보였다. 급기야 2017년 4월 17일 미국 백악관이 ‘북한의 도발과 관련해 레드라인은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북한이 ‘새로운 길’을 가는데 미국이 또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전전긍긍한다면 미국이 밀리는 양상이 되며 미국의 체면이 크게 깎이지 않을까 예상된다. 그런데 그 정도가 체면이 깎이는 정도에서 그칠지 그 이상일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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