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일본 매체 데일리 신초는 「[단독] 안토니오 이노키 씨 “나의 스승 역도산이 북한의 귀국선을 타고 니가타에 온 딸 김영숙과 대면한 날”」이라는 제목으로 2017년 안토니오 이노키(본명: 이노키 간지) 씨와 나눈 대담 전문을 공개했다.
“저를 프로레슬링 세계로 이끌어준 스승님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 그것이야말로 북한이었습니다. 스승님이 평생토록 품어온 그리움을 제 가슴에 담아 북한에 가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노키 씨가 위 인터뷰에서 한 말.
이노키 씨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본명: 김신락)의 일본인 수제자이다.
역도산은 1950~60년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풍미했다. 역도산은 살아생전 북일관계 정상화에 나서겠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야쿠자(일본 조직폭력배)의 습격을 받아 갑작스레 사망해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역도산의 꿈은 수제자인 이노키 씨가 대신 이어받았다.
이노키 씨는 1989년에 스포츠평화당을 창당했고 참의원(일본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이노키 씨는 스승의 꿈인 ‘북일관계 정상화’를 이루기 위해 평생토록 분투했다. 이노키 씨는 이 집념으로 33차례나 북한을 찾았고 역도산의 딸(김영숙)을 비롯한 여러 인사와 교류했다.
이노키 씨는 ‘북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자신을 써달라’라고 호소했지만 일본 정치권은 끝내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의 여론은 오랫동안 북한을 무작정 ‘악당’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스승의 조국인 북한을 직접 마주한 이노키 씨는 북한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이노키 씨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사는 나눔의 집을 찾고 2018년 3차례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극찬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힘든 상황에서도 이노키 씨는 휠체어를 타고 북한을 찾았다.
지난해 2022년 10월 1일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노키 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혐한·혐북’이 일상인 일본 사회에서 이노키 씨가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이노키 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스승과 북한에 관해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 대담은 남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담 내용을 흐름에 맞게 각색해서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안토니오 이노키 씨가 스승 역도산과 북한에 관해 밝힌 대담(「신초45」, 2017.11.)
1. 역도산과 이노키의 깊은 인연
제가 혼자서 북한과 외교관계 정상화에 나선 건 국회의원이 된 직후였습니다.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저와 북한을 이어준 것은 전후 최대 일본의 영웅 가운데 한 명이었던 스승님, 역도산입니다.
제가 1989년에 스포츠평화당을 창당하고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도 스승님의 영향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역도산은 은퇴 뒤 참의원 후보로 나설 생각이었고, 극비리에 출마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정계에 진출하고자 했던 가장 큰 동기는 스승님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의원이 되고서 5년이 지난 1994년, 북한 핵사찰이 국제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당시 저는 북한 문제에 관해 거의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료를 가까이 두고 되풀이해 계속 읽던 중에 생전 스승님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저는 한 신문 기사를 읽고 스승님의 딸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스승님이 당연히 자이니치(재일동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이 북한 출신이라고 쓰인 기사를 읽어 나가면서 ‘혹시 그때 그 일이...’라며 마음에 짚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1961년쯤이었을까요. 스승님에게 혼담 관련 이야기가 난데없이 들려왔는데, 분위기를 띄우고 판을 벌일 겸 니가타까지 스승님을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째서인지 딱 하루만 스승님의 주변 사람들에게 휴식이 주어졌는데요. 저는 ‘스승님이 취미인 골프를 하고 계시겠구나’ 정도로 생각했고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북한에서 온 ‘귀국선’이 니가타항에 머무르고 있었고, 스승님은 그 배를 타고 일본에 온 친딸 김영숙 씨와 대면했습니다.
스승님의 본명은 ‘김신락’으로 6형제 중 막내아들입니다. 스승님의 큰형님은 조선 씨름의 최고봉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체격이 건장했던 스승님도 10대 중반부터는 어른들과 겨루는 씨름대회에 출장해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연히 그 대회를 보고 있던 니쇼노세키베야(二所ノ関部屋·일본 스모협회 회원들이 소속된 단체 중 하나) 후원회 관계자가 스승님을 스카우트해 일본에 데려왔습니다. 그 뒤 스승님은 관계자의 양아들이 되어 모모타 미쓰히로라는 일본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은 1963년 12월에 돌아가셨지만 같은 해 1월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일한 국교는 정상화되지 않았습니다만 한국 측에서 은밀하게 초대했습니다. 그 당시 방한 자체가 특별 대우였는데 스승님은 현지에서 상상 이상으로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스승님은 한국 측 관계자에게 ‘한 가지만 부탁이 있습니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판문점에 가고 싶다’라고 말입니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60킬로미터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겨울은 몸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춥습니다. 그런데도 스승님은 판문점에 도착하자마자 웃옷을 벗고 휴전선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경비를 맡은 병사들은 놀라서 흠칫했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런 분위기에도 상관없이 스승님은 웃옷을 벗은 채로 휴전선 저편 북한을 향해 외쳤다고 합니다. 아마 ‘어머니!’라고 외치는 스승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저를 프로레슬링 세계로 이끌어준 스승님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이 북한이었습니다. 스승님이 평생토록 품어온 그리움을 제 가슴에 담아 북한에 가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 첫 방북‥스승의 딸과 만남·평화의 제전
1994년 7월, 중국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기로 했을 때는 베이징의 공항에서 북한 외무성 관리가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사정이 있어서 방문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전해왔습니다. 그 당시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고 이건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에 귀국한 뒤 다시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았고 같은 해 9월이 되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만남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사람이 스승님의 딸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김일성 주석은 ‘역도산이라고 하는 동포가 일본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스승님의 딸은 국가가 대학을 마치도록 보장해주었고 국가체육위원장을 맡은 남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2명의 딸, 즉 스승님의 손녀는 역도선수를 지냈고 코치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를 키웠습니다. 더욱이 증손자인 16살 소년은 유도선수로서 장래가 유망해 도쿄올림픽 출전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딸과 대면했을 때, 그 곁에 있던 사람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김용순 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평양에서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 및 문화 축전(평화의 제전)’을 개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역도산이 온 일본을 열광케 한 프로레슬링을 북한에 소개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은 보통 이런 제안을 받으면 검토하느라 답변을 늦게 줍니다.
그런데 평화의 제전에 관해서는 고작 1주일 사이에 관련 위원회가 마련됐고 ‘개최하자’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95년 4월에 무하마드 알리까지 초대한 대대적인 행사를 평양에서 개최했습니다. 평화의 제전이 열린 평양 능라도 5월1일 경기장에는 2일 동안 38만 명이라는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서 ‘하룻밤에 반일감정이 해소됐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북한은 전 세계에서 3만 명이 넘는 관객과 언론을 맞아들였습니다.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평화의 제전이 열리기 전까지 북한에는 대단한 반일감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인이 평양을 걸으면 돌을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였는데 ‘하룻밤에’ 일본을 향한 생각이 뒤집힌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평양을 찾으면 시민이 저의 손을 잡고 흔들어 줍니다.
저는 평화의 제전을 계기로 계속 방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북한 고위 정치인과의 연이은 만남
방북 초기에는 북한 중요 인사와 만나는 자리에서 30분 가까운 북한 측의 말을 들었습니다. 연설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얼마나 가혹한 숙명을 안고 있는지 아는가’ 이러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회담이 끝나고 북한 측이 ‘답례’로 공식 축하 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북한 인사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또한 저의 외교 방식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북한에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진전이 없는 때도 있었습니다.
2017년 9월에 다시 방북하면 저는 무려 32번이나 북한의 땅을 밟게 됩니다. 이번에는 작년처럼 리수용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 초대해 방북합니다. 리수용 부위원장은 북한 외교를 총괄하는 거물 중 한 사람입니다.
회담 첫 발언에서 리수용 부위원장은 ‘이런 정세에 오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잘 와주셨습니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외교 경험이 풍부한 리수용 부위원장이 국제정세도, 일본을 둘러싼 상황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민당의 한 주요 인사가 방북하고 싶은 의향이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물론, ‘방북하지 말라’는 아베 정권의 방침도 있기 때문에 아직 정식으로 결정 난 건 아니고 서한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민당 내부에도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정치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제재 일변도가 아니라 대화를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 측은 처음에 ‘의제가 뚜렷하지 않은 단계에서는 어렵겠네요’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최종적으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답을 주었습니다.
물론, 북한 측의 ‘긍정적’이라는 말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쪽에서는 나름대로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작년에 마쓰나미 겐타 중의원(일본유신회 소속 하원의원) 등과 함께 방문한 것처럼, 자민당을 포함한 일본 의원단이 방북하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니 북한 측은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라며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북한은 마음을 허락한 상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제 처지가 난처해졌습니다. 대북 제재가 시작되고부터는 문자 그대로 북한이 준 선물조차 일본에 가지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일본 세관이 짐을 모두 열어서 책도 한 장씩 넘기며 조사하니까 말입니다.
경제 제재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석유 수출 제한을 단행한 새로운 유엔 대북 제재 결의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북한 측은 ‘어떤 제재를 받아도 맞서겠습니다. 이 이상 압력을 가하겠다면 우리는 더 엄격한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회담 뒤 평양 시내도 둘러보았습니다만 경제 제재에 따른 영향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10년 전과 비교해 고층 건물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난 인상을 받았습니다. 길거리가 단숨에 근대화됐습니다. 신경 쓰였던 점 하나가 있었는데, 9월 9일 ‘공화국 창건일’ 경축 행사입니다.
경축 행사에서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인사를 건넸습니다만 언제나처럼 군사 열병식과 화려한 불꽃놀이는 볼 수 없었습니다. 내년에 있을 공화국 창건일 70주년 기념식에 자금을 집중하려 올해에는 수수하게 치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2016년에 방북했을 때 북한 측은 ‘벌써 수소폭탄은 완성됐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핵시험(4·5차) 규모를 생각하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폭탄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죠.
4. 북한을 둘러싼 일본 정치 현황
미사일 발사와 핵시험이 연이은 시기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방북에 여러 의견이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뭐야! 이노키는 북한에 아부를 떠는 거냐!’ 이런 비판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모든 국민에게 북한 방문을 자제할 것을 요청한다. 이 정부 방침대로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라고 은근히 방북을 보류하라고 요구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지금 북한이 일본의 위협이라는 건 틀림없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제 방북이 명성을 얻기 위한 행위라는 말만큼은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명성을 얻으려면 여론을 타고 ‘북한에 제재를 가하자!’라고 외치는 편이 훨씬 좋겠지요. 제가 수많은 비판을 받아도 북한 문제에 계속 관계를 맺으려 하는 건 일관된 정치이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본 국민이 긴박한 상황에 직면해도 결코 북한과 교섭의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994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래 매년 방북을 거듭해온 저라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대로 대북 경제 제재를 계속해봤자 북한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 관해서는 일본의 사고방식이 얕습니다. 지금은 대화는 뒤로 밀리고 북한을 향해 압력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교섭이라는 선택지를 항상 남겨 둬야만 합니다.
자민당이 정권을 잃었던 때 북한에서 막 귀국한 저는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와 만나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북한과 교섭해야 한다는 제 의견을 말했더니 ‘우리는 야당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일본 정치판이 이 모양 이 꼴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아베 총재가 총리가 되고 나서도, 역시 일본 정부는 제재 강화 이외에는 다른 수단을 모색하지 않았습니다.
선거 시기에 의원 후보들은 ‘저는 목숨을 걸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 정치인들은 윗선에 잘 보이려는 처신만 뛰어나지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습니다. 장관 같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생각만 합니다. 저는 그런 정치인들을 ‘장관병’에 걸렸다고 표현합니다.
현재 최대 과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의 교류와 대화에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당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바마 정권은 북한이 비핵화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교섭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라는 방침을 유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미국과 뭘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북한이 트럼프 정권을 오바마 정권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세는 기대했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본래 일본에 북미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만한 기량이 현재 일본에는 없습니다.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북한을 제재하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유엔을 내세워 떠받드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5. ‘인생 마지막’을 불태우는 이노키의 포부
일본에서는 ‘북한과 교류하자’라는 목소리가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제가 납치당해 흠씬 두들겨 맞게 될지라도 이건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며 높은 자리에 있는 인사들이 ‘왜 저를 써먹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럴 만한 배포가 있는 정치인이 없는 것입니다.
북한은 현재 162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각국에는 대사관도 있습니다. 저는 오는 9월 방북하면 ‘일북 연락사무소를 개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평양 시내에 스포츠 평화교류협회사무소를 마련하겠다는 구상도 있었습니다만, 대북 제재가 점점 가혹해져 이건 힘들게 됐습니다.
스포츠 외교를 강조해온 제가 걱정하는 건 2018년에 열리는 평창겨울올림픽입니다. 평창에서 휴전선까지는 고작 80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게는 올림픽 일부 경기를 북한 마식령 스키장에서 열어보자는 방안도 있었습니다만, 지금 상황으로는 어렵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최악의 상황에서는 평창올림픽 개최 자체가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포츠가 불러오는 감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여론을 움직이자, 나아가서는 일본과 북한이 갈등 없이 화목하게 지내는 날을 도모하자’ 이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스포츠 외교입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