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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2) 지춘란, 정의의 전쟁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국민당과 싸우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10/18 [10:14]

[사람을 찾아서] (2) 지춘란, 정의의 전쟁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국민당과 싸우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10/18 [10:14]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여성 빨치산 지춘란은 부군 황금수에게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의 유언인 “남도부 3지대가 어떻게 싸웠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라고 자주 말했다. 

 

무엇보다 지춘란은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과 신념에 의해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위해 2개의 전선에서 미국과 싸웠다.

 

하나의 전선은 중국의 국공내전(중국은 ‘해방전쟁’이라 부른다)이고, 또 하나의 전선은 한국전쟁이었다.

 

지춘란에게 2개의 전쟁은 미국의 개입으로 인한 계급·민족적 예속을 반대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

 

 

반소, 반공 기지 건설을 위한 미국의 중국 개입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중국 전구에 대한 일본군 항복 문서 조인으로 중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일전쟁에 승리한다.

 

그러나 국토는 파괴되고 국력은 피폐하여, 국민은 기아로 고통받는다. 

 

중국 전쟁 피해는 “현재 중국에서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에 걸친 전쟁으로 중국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3천5백만 명 이상, 재산 손실 6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라고 쓰여있다.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회 옮김, 『중국 근현대사 3 -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삼천리, 2013.)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항복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소련은 동구 유럽을 지원하여 소련식 공산주의 모델을 이식한다.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추진한다. 그리고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정면 대응하게 하고, 전쟁 승리 후에는 만주가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중국을 반소·반공 기지로 만들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국민도 국민당 정부와 중국공산당의 내전을 반대하고, 중국의 통일을 요구한다. 

 

미국의 개입으로 1945년 8월 말부터 10월까지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 회담이 충칭에서 개최된다.

 

중국의 초한지에 나오는 유명한 고사성어인 홍문지연(鴻門之宴)이 유방과 항우를 대체해 20세기에 마오쩌둥과 장제스로 재연된 것이다.

※ ‘홍문지연’은 항우가 홍문에서 연회를 열어 유방을 해치려 했으나 유방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겉보기엔 화려한 잔치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살의가 가득 차 겉과 속이 다른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리고 1945년 10월 10일 국공 양당의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통일국가 건설에 합의하는 ‘쌍십회담기요(雙十會談紀要)’를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지방 정권과 중국인민해방군 등에 대한 처리 방법, 일본이 지배한 동북 지구의 행정·군사 등의 접수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당과의 대립이 격화한다.

 

 

‘정의의 전쟁’, 국공내전

 

이미 미국은 중국을 아시아의 반소, 반공 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장제스에게 군사원조와 지지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은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을 선점하기 위해 장제스 국민군을 수송하여 중국 각지에 배치한다. 

 

또한, 1945년 8월 14일 소련과도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장제스는 소련에 중국공산당을 지원하지 말고 중국에 대한 원조는 국민정부(국민당 정부)에 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 국민당 군대는 106개 사단에 200여 만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보병뿐만 아니라 공군, 해군도 갖추었다.

 

중국공산당은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진주와 접수가 장제스 국민당 군과의 충돌로 이어져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미·영·소 앞으로 보내는 각서에서 국민정부를 ‘국민당 정부’로 부르면서 공산당은 국민정부를 중국의 정통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공농홍군을 중국인민해방군으로 개칭했다.

 

1946년 6월 26일 장제스가 공산당의 중원해방구를 공격하며 국공내전(해방전쟁)은 시작된다.

 

당시 양측의 전력은 지배하고 있던 인구수, 토지 면적, 도시 수, 군 병력, 무기 등을 대략 계산했을 때 국민당이 공산당의 4배 우세였다. 국민당은 1947년 3월 옌안을 점령했고 장제스는 1948년 설날에 발표한 연두사에서 “1년 이내에 공비를 일소하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장제스의 호언장담 뒤에는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고 영국과 프랑스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뒤에도 소련과 북한이라는 든든한 후방이 있었다. 

 

 

국공내전 후방, 평양 주재 동북국 판사처

 

국공내전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 입장과 임무는 “이윽고 장제스가 1946년 6월 동북에서 내전을 일으키자 중국공산당 동북국은 그해 7월 북을 남만 지역 작전을 지원할 후방으로 활용키로 하고 평양에 북한 주재 동북국 판사처(일종의 대표부, 공식 명칭은 ‘평양이민공사)를 설치한다. 북이 동의했음은 물론이다. 판사처의 임무는 부상자 후송과 치료, 전략물자 수송, 북을 통로로 이용한 남만과 북만 연결, 인원과 물자 교류, 북의 원조물자 접수와 구입 등이었다”라고 나와 있다. (김동원 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도서출판 4.27시대, 2021, 109~110쪽.)

 

특히 구체적 지원에 관해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은 또 이렇게 전한다. 동북해방전쟁과 관련한 중국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주체36(1947)년의 첫 7개월 동안에 우리나라에서는 동북민주연군 측을 위해 21만 톤의 물자를 수송해 주었고 그 이듬해 한 해 동안에는 30만 900톤의 물자를 수송해 주었다고 한다. 조선을 통과한 인원은 주체35(1946)년 하반 년에 18개 부대에 이르렀고 주체36(1947)년 9개월 동안 조선에 들어왔다가 동북근거지로 간 인원은 1만 명 이상이나 된다. 주체37(1948)년에 남양 교두를 통과하여 근 9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갔고 신정치협상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의 적지 않은 민주당파, 무당파와 해외교포 대표들이 조선을 경유하여 흑룡강성(헤이룽장성) 할반(하얼빈)으로 갔다. 사업상 용무로 조선을 통과한 조선공산당 간부들의 수는 더욱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라고 쓰여있다. (김동원 외, 앞의 책, 110쪽.)

 

 

지춘란, 중국인민해방군 제72단 위생원으로 입대하다

 

이런 엄중한 국공내전 속에 지춘란은 1947년 3월 25일 만주 지린성에서 ‘미국의 앞잡이’ 장제스 국민당 군과 싸우기 위해 중국인민해방군 제72단에 입대한다.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이 삼촌과 오빠의 영향으로 일찍 공산주의에 눈을 떴고, 웅변을 잘했다. 그래서 중국인민해방군 선전 요원으로 자원입대했으나, 심사 담당 간부가 현재 내전으로 전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이라 간호 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위생원 요원으로 갈 것을 추천했다”라고 증언했다.

 

지춘란의 부대 제72단의 존재 여부는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길재준·리상전, 평양외국문출판사, 2016.)와 『현대 조선의 탄생』(박경순, 내일을여는책, 2020.)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7지대(림창배·변철호, 저서명 불명, 료녕민족출판사, 1996.)에 나와 있다.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에는 “길림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된 최용건의 지시로 조선 사람 500여 명을 모체로 길림군구 72연대를 조직하고 강건과의 연계 밑에 송무선이 연대장을 하였다”라고 되어있다. (48쪽)

 

▲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49쪽의 일부.     

 

그리고 『현대 조선의 탄생』에는 “길림에서는 최용건의 지시로 조선인 500명을 모체로 길림군구 72연대가 조직되었고 송무선이 연대장을 맡았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항일유격대 출신의 군정 간부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해 25만 명에 달하는 조선 청년들이 동북해방전쟁에 직접 참가했다고 밝혔다. 또 중국 만주 공산당 핵심 간부인 주보중은 1948년 말 작성한 37개 사단 명단에 12만 명이 조선 사람이었으며, 1945년 8월부터 1948년 말까지 희생된 조선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해 놓았다”라고 쓰여 있다. (332~333쪽)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용군 제7지대에는 “영길현 오리하자 사람인 송무섭동지는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위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투항한 후인 1945년 11월에 솔선적으로 창군하였다. 그때 그가 소속된 부대는 길림성 보안대 3종대 7영이었다. 그는 1련 3패의 패장으로 있다가 그후 조선의용군 제7지대 화전보안퇀 길남구분구 독립72퇀, 동북민주련군 제8종대 24려 72퇀에서 련장, 부영장직을 역임하였다. 송무섭 동지는 50~60차의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올린 지혜롭고 용감한 군사지휘원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236쪽)

 

조선의용군 제7지대236~237쪽.     

 

그리고 “퇀”은 연대급이고, 용어 차이는 있지만, 부대 ‘길림군구 72연대’와 ‘길남구분구 독립72퇀’은 같은 부대이고, 송무선과 송무섭은 동일 인물로 판단된다.

※ 참고로 영, 련, 패, 퇀, 려 등은 모두 중국 인민해방군의 편제 단위이다. 영(營), 퇀(團), 려(旅)는 한국군의 대대와 연대, 여단에 해당하며 ‘패’는 소대, ‘패장’은 소대장 그리고 ‘련’은 중대라고 한다.

 

지춘란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 지춘란은 4280.3.25 만주 길림성에서 중공군 제72단 전사(위생원)로 입대 후 만주 중국 본토에서 국부군과 대전하면서 중공군 부상병을 치료하여 오던 중 4282.5월 양사(소위)로 승진 4282.9.4 중국 공산당에 입당”까지가 중국 국공내전에서의 행적이다. 

※ 연도는 단기로 단기 4280년은 서기 1947년임.

 

▲ 지춘란 판결문. [자료 제공: 황금수]     

 

※ 이후 격주로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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