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춘란은 국공내전(중국 인민해방전쟁)에서 위생원으로 참전한다.
사실 국공내전 시기 동북 지방 조선인의 참전은 일제 강점기 중국공산당과의 공동항일(共同抗日) 투쟁의 연장선으로, 중국 혁명 역사이자 조선 혁명 역사이다.
동북 지방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의 세 성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흔히 만주(滿洲)라 부른다.
만주는 조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만주 조선인들 가운데 중국의 민족해방을 중요시한 사람도 있지만, 조국 한반도의 민족해방도 중요시하며 둘 다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즉, 만주에서의 국공내전은 중국 민족해방투쟁, 반제·반봉건·반국민당 투쟁이자 조선 민족해방투쟁이었다.
1910년대 조선의 독립운동기지 만주
만주는 역사적으로 고구려,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번갈아 주도권을 장악했다.
조선 말기에는 동만(현재의 연변) 지방의 경우,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척되면서 1910년대부터 조선의 독립운동기지였다.
그리고 만주는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의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기지였다.
특히, 1907년 비밀결사 단체로 국권 회복과 더불어 공화정체(共和政體)의 자유 독립국 수립을 목표로 한 신민회가 해외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군사 방면의 구국운동을 하고자 했던 곳이 만주이고, 그 결실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첫 사업으로 처음에는 신흥강습소였다. 이를 위해 우당 이회영 6형제는 모든 명예와 부귀영화 그리고 전 가산을 처분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했다.
신흥무관학교는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려고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사실상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지였다.
북간도 지역에서도 대종교 계열의 항일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이 나중에 북로군정서로 발전한다.
또한, 1906년 이상설은 만주 용정에 민족 교육기관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기여했다.
북간도 등지에서 조직된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이후 청산리 전투를 이끌게 됐다.
1930년대에 이르면 서·북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의 조선인 인구는 200만에 달한다. (연변일보, 1991.9.6.)
1931년 만주사변과 조선의 항일유격대 창설
일제의 억압적 지배와 민족 차별 그리고 멸시로 반일 정서가 지극히 높았던 동북 지방은 수많은 항일단체와 걸출한 항일 명장들을 배출했다.
1920년 홍범도를 수반으로 하는 여러 갈래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길림성의 왕청현 봉오동과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동만 일대에서 경신대토벌 대학살을 감행하여, 3,500여 명이 희생되고 5,058명이 체포되었으며 2,500여 채의 가옥이 불에 탔다. (길장일보, 1920.11.10·15·19.)
그리고 1920년대 활발했던 민족주의 무장 항일단체는 불행하게도 거의 소멸하게 되지만, 이러한 시련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항일무장투쟁은 계속된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 지방을 침략하기 위하여 중국 동북군을 공격하고, 심양을 점령하는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했다. 이제 만주는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이 된다.
1927년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이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항일유격대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었고, 상당수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예컨대 1931년 2월 함마하자(唅馬河子) 일대의 반일 폭동 중에 조직된 반석유격대(磐石遊擊隊)는 이홍광(李紅光)이 부대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이후 항일연군 제1군 참모장을 맡았으나 일본군,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다.
동북항일연군과 조선 해방투쟁 기지 만주
만주는 조선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다.
북만의 요하지방에서는 최용건(崔庸健)이 1933년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요하공농병(饒河工農兵) 반일유격대를 발족한다. 동만의 유격부대는 1936년 3월, 산하에 3개 사(師)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2편으로 개편된다.
이종석 저서 『북한-중국관계(1945~2000)』(도서출판 중심, 2001)에 따르면 “이 개편에서 김일성은 제3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그의 부대는 조선 해방과 연관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조·중 국경지대인 장백현 일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제3사는 동남만 유격대의 통합편재로 인해서 곧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로 개편되었으며,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 1936년 5월에 결성된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사업을 추진하는 주체가 되었다. 김일성의 제6사는 국내 진공작전의 일환으로 1937년 6월에 보천보전투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부대가 주도한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과 장백현 일대의 조직은 1937년 10월과 1938년 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일제의 검거 작전에서 조직원 739명이 체포됨으로써 와해되고 말았다. …중략… 1939년 가을부터 전개된 일제의 대토벌에 직면해 만주 전역의 유격대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이에 소련군과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은 1940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회의를 갖고 항일유격대의 소련 국경 내로의 이동에 합의했다”라고 한다.
이후 중국 동북 지방의 항일연군 부대들은 항련교도여단(抗聯敎導旅團, 일명 국제여단 또는 88여단)으로 개편된다.
김경일의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논형, 2005)에는 “소련의 극동 지구에 세워진 국제여단(國際旅)에는 동북 중국공산당의 주요 수뇌부와 동북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해 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핵심이 집결하여 있었다. 두 민족의 공산주의자들은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을 함께 전개하였으며, 국제여단에서도 소부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동북 지방에 침투하여 정찰 활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주보중, 이조린, 김일성 등이 이런 소부대 활동을 직접 지휘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보중은 소련 측 책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일성이 남만 제1로군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간부이며 양정우, 위증민 두 동지가 희생된 후 그가 남만 유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남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계속 책임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춘란, 조선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 용정 출신으로 항일 반국민당 주의자였다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은 중국 동북 지방 용정 출생이다. 할아버지부터 3대가 살았는데, 제적등본에 따르면 지춘란은 함경북도 경성군 어량면 출신으로 나온다. 판결문에도 본적이 함북 경성군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가 일본 강점기에 용정으로 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증언했다.
그래서 지춘란은 일제의 박해가 잔혹했고 반국민당 정서가 지극히 높았던 동북 지방 출신으로, 자연히 중국인민해방군 제72단 전사(위생원)로 입대한 것이다.
또한, 황금수는 “그녀는 국공내전에 참전하면서 전상자를 야전병원에 입원시키고 주로 중증 환자를 책임 맡는 일에 종사했다. 중국 야전병원은 2개의 기관, 하나는 전상자 위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증 환자 위주 병원으로 나뉘는데 지춘란은 중증 환자를 책임졌다. 중증 환자는 폐결핵 환자, 간염 환자 등의 질병을 갖는 사람을 주로 치료하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황금수는 “지춘란은 함께 살면서 중국인민해방군 노래를 즐겨 불렀다. 이유는 중국인민해방군의 교육 수준이 낮다 보니, 규율과 이론을 노래로 쉽게 만들어 교육했다고 한다. 대부분 노래가 가르치는 것은 애국자, 운동가, 용사 등의 내용으로 항상 불렀다고 한다”라고 강조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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