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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전쟁 이전의 전쟁, 반동과 혁명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12/27 [00:51]

[사람을 찾아서] 전쟁 이전의 전쟁, 반동과 혁명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12/27 [00:51]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를 필두로 한 선진 제국과 후발 제국인 독일·일본과의 식민지 쟁탈과 재편 과정에서 제국주의 간의 모순에 의한 필연의 역사였다. 

 

또한, 전 지구적 수준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전쟁과 투쟁이기도 했다.

 

거시적으로는 세계의 반제·반파쇼 투쟁과 인민해방운동이었다. 그리고 반자본주의·공산주의 혁명이었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을 겪어 왔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은 공산주의 혁명 등을 통해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면서 착취와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자주독립에 이르는 길은 나라마다 방법은 달랐으나 식민지 민중에게 해방의 감격은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았다.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의 존엄성 회복 그리고 삶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와 토지, 자유, 평화에 대한 열망이 넘쳐났다.

 

그리고 혁명과 조국을 위해서라면 민중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질 수 있었다. 

 

지춘란 또한 마찬가지로 혁명과 조국을 위해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과 신념으로, 민족해방과 민중해방 쟁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제 지춘란에게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반제·반봉건·반국민당 혁명 뒤 조국인 조선 반도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흉흉했다.

 

특히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한국인은 미군의 적’으로 선언하고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의 상륙과 포고령 통치

 

9월 3일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군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 장교들에게 한국인은 ‘미군의 적’이라고 말하며, “항복의 조례와 규정을 적용하라”라고 지시했다. 

 

이는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 2호, 3호를 통해 구체화했다. 

 

포고령 1호 ‘조선 주민에 포고함’ 일부에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포고령 2호 ‘범죄 또는 법규 위반’에는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지휘관의 권한 하에 발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 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군율 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이라는 내용을 적시했다. 

 

포고의 내용으로는 미군이 군사적으로, 점령군으로 적대 지역에 진주한 것이다.

 

이남에서 자주적 치안권 및 행정권을 담당했던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고, 심지어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불인정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에 부역한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 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에 고용되어 편입되었다.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고, 일제 순사복 대신 양키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제2의 제국 통치가 시작된다.

 

  © 미8군



 

해방 이후 반동과 혁명

 

해방공간 초기를 묘사한 김석범(1925년 일본 오사카 출생)의 제주 4.3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 『화산도(5)』에는 “미군의 상륙. 이승만의 미국으로부터의 귀환. 좌우의 격돌, 좌익에 대한 대탄압, 멸공 입국이 유일한 대의명분이 된 시대가 도래했다. 남한은 해방 후 1년이 지나지 않은 사이에 파시즘이 판을 치는 무법천지, 테러 사회로 변모하는 역사의 배반이 일어났다. 그리고 ‘빨갱이’ 사냥, 반공 투쟁의 조직화, 반공국시의 확립, 그 주역, 선봉대로서의 서북청년회의 결성(1946년 12월)…”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깨어 있는 민중에게는 혁명의 시대였다.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1934년 경남 함안군 출생)가 기억하는 해방 초기는 그야말로 혁명의 도가니였다. 그는 겨우 열 살을 갓 넘긴 소년이지만 레포(연락원)로 활동한다. 

 

황금수는 “해방 직후 진보적 서적이 많지도 않았지만, 좌익 서적들은 대부분 토씨만 국문이고 나머진 거의 한문투성이였기에, 서당에 다닌 나를 통하여 동무와 청년들은 한문 읽는 법을 배우게 되어, 자연히 함께 혁명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세포 활동은 대부분 학습이었다. 동무들은 당시 유행어인 일취월장(日就月將)처럼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해방 당시는 ‘자원적 질서’라 하여 극장에서의 금연과 줄서기 등 새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두 노력하였다. 이때 나온 시가 김기림의 「새나라 송(頌)」인데, 일부 낭송하면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이다. 그런데 양키가 들어오면서 자유를 빙자하여 질서는 무너지고 중구난방이 되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연합국이 서로 적이 되는 모순의 시대, 냉전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요인은 독일군 전력의 80% 이상이 집결된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소련에 패하였기 때문이다.

 

서부전선인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서부, 독일에서의 연합국 승리는 미국이 군사 장비 보급에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혈전을 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미국과 소련의 두 초강대국으로 나뉘는 냉전이 시작되자, 동부전선 승리의 일등 공신인 연합국 소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의도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소련을 동맹국에서 적국으로 보고, 독일을 적국에서 동맹국으로 역사를 바꾸어 나갔다. 그리고 추축국(樞軸國)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의 회원국이 된다.

 

추축국(樞軸國)인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5월 평화헌법을 공포하고,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은 후, 1952년 4월 주권 회복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다.

 

함께 연합하여 독일과 일본에 싸웠던 미국과 소련이 서로 적으로 돌변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이런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과 1947년 2.28 타이완 사건 그리고 1947년 10월 인도·파키스탄 전쟁, 1948년 5월 1차 중동 전쟁 등 민족해방 전쟁과 신식민지 전쟁이 발발한다.

 

당연히 미국과 소련은 이러저러한 전쟁에 관여하게 된다. 

 

특히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이었던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열전(Hot War)에 미국은 직접 개입한다.

 

 

전쟁 전의 전쟁

 

한반도는 이런 국내·국제정세 속에서, 특히 이남 사회는 반동과 혁명으로 혼란과 혼돈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미군정은 이런 반동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조선인 폄하와 인종차별 그리고 친일파를 등용하며 공격했다. 

 

또한, 미군정의 비호 아래 경찰과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 반동 단체들은 테러와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민중은 새 조국 건설의 꿈은 물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유린당한다.

 

그리고 좌익 세력에 대한 야수적 무차별적 탄압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노동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총연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동맹 등은 불법화된다.

 

이승만은 ‘국토 분단’을 기정사실로 하고,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해 전쟁 전의 전쟁을 불러왔다. 

 

미국이 ‘국토 분단’을 하고 이승만은 ‘국가 분단’을 한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1988) 머리말에서 “1950년에 발발한 전쟁의 기본적 문제들은 해방 직후 불과 3개월 이내에 이미 뚜렷해졌다. 그 결과 농민반란, 노동분쟁, 게릴라 전쟁 및 38선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공공연한 무력충돌 등을 통하여 결국 1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모든 것이 표면적인 한국전쟁의 발발 이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싸움의 성격은 내부적이며 혁명적인 것이었고, 1945년 직후에 시작되어 혁명과 반동의 논리 하에 진행되었다. 1950년 6월의 전통적 전투의 개시는 이 전쟁이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미군.  



이런 상황 속에 중국 동북 3성 조선인 장병들은 조국 이북으로 귀국한다.

 

 

동북 3성 조선인 장병들의 이북 귀국

 

일제는 괴뢰 만주국을 건립하고 ‘만주국협화회’를 만들어 조선인을 ‘2등 국민’으로 차별하면서, 중국인을 부추겨 조선인과 이간질하는 분열 공작을 폈다. 동북 3성 조선인은 중국인과 갈등했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승리 이후에는 자연히 자신의 조국인 이북으로 돌아갔다.

 

중국 조선인에게 조국이란, 살기 위해 떠나 현재 정착한 중국이 아니고, 오천 년 역사와 민족의 얼 그리고 조상 적부터 살아온 한반도였다. 그러나 한반도 이남은 ‘반동’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자연히 혁명의 땅 이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지춘란 또한 마찬가지로 조국 이북으로 귀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판결문과 부군 황금수 증언과는 차이가 있어 확인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황금수의 “6.25전쟁 시기 후방부대에 배속되기 전까지 남쪽으로 부대와 함께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라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귀국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동북 3성 조선인 부대는 중국의 인민해방전쟁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귀국해서 조선인민군 5사단(김창덕 사단장)과 6사단(방호산 사단장) 그리고 제12사단(전우 사단장)으로 편성된다.

 

그리고 이 부대들은 6.25전쟁 발발 시 참전하는데, 지춘란이 빨치산에 배속되기 전까지 남쪽으로 간 적이 없다면, 항미원조지원군 말고는 입북(入北) 경로가 없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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