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 내에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핵능력을 인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나는 북한의 핵·미사일 역량이 상당한 수준에 있고 북한의 위협이 매우 객관적이고 실질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이 미국의 동맹국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를 직접 위협하고 있다는 시각입니다.
미 국가정보국(DNI)은 3월 11일 발간한 「2024 연례 위협평가 보고서」에서 북한이 핵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핵 무인 공격정, 순항미사일, 무인기, 핵공격잠수함, 고체 연료 탄도미사일, 정찰위성,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극초음속 미사일 등을 위협 요소로 꼽으며 미국과 동맹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이건 미국의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의 평가라서 비중 있게 다뤄야 합니다.
그레고리 기요 미 북부사령관 겸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관은 3월 12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이용해 핵탄두를 미 본토로 운반할 능력을 구축했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북부사령부는 미 본토 방어 활동을 지원하고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는 미사일 공격 등 항공 우주 위협으로부터 미국 영공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곳의 총책임자인 기요 사령관이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역량과 북한의 위협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대책도 그것에 맞게 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올해 들어 로버트 칼린 미들베리국제연구소 연구원과 시그프리드 헤커 교수는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하다며 “미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 정 박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겸 대북특별부대표는 북한과 ‘비핵화 중간 단계’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 북한의 핵위협이 심각하니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북한의 핵능력은 과장이라는 주장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역량이 낮아 위협적이지 않으니 동요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입니다.
이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북한의 주장 말고는 검증되거나 확인된 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2월 5일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국의소리(VOA)와의 대담에서 “북한의 순항미사일이 해상이 아닌 육지 지형에서 저고도로 비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라며 “북한은 아직 지형지물 인식 능력이 있는 순항미사일을 보유하지는 않은 것 같으며, 이런 능력이 없는 순항미사일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버트 피터스 헤리티지재단 핵 억제 및 미사일 방어 연구원은 “(미사일 발사 결과) 원격 측정 데이터는 엄청나게 많고, 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라며 “현재로서는 데이터 처리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한 협박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의 미사일 전문가 로베르트 슈무커 박사는 “북한은 기술력이 열악하다”라며 “북한의 잇따른 순항미사일 발사는 단순 시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북한의 미사일 역량은 극도로 과대평가됐다”라며 “북한은 극초음속 미사일 역량이 없다”라고도 했습니다.
슈무커 박사는 2012년 4월 15일 북한 열병식에 등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가짜 모형이라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으니 북한을 무시하고 스스로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시드니 사일러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반도국장은 1월 27일 미국의소리에 출연해 “북한군 태세 자체에도 특이 사항이 없다. 이게 중요하다”라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중앙위 확대회의에서 지방 경제 상황 개선을 강조했다. 전쟁 준비 말고도 다른 것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전쟁 전야’라는 발언이 과장으로 여겨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넷 연구원은 3월 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침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고 본다”라며 북한 군부의 불만이 고조될 경우 이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남침을 지시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최근에 북핵 문제 해법으로 나온 ‘비핵화 중간 단계’ 방안에도 회의적입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비핵화 중간 단계’를 두고 “‘행동 대 행동’, ‘중간 단계’ 등의 대북 접근방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시간을 더 벌어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조정관은 “지금 북한은 어떤 중요한 중간 조치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라면서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 비핵화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윤석열 정부도 현재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북한은) 최악의 퇴보와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체제 유지도 힘든데 전쟁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읽힙니다.
신원식 국방부장관은 북한이 지난해 11월 21일 발사에 성공한 정찰위성 만리경-1호에 관해 작동하지 않고 돌기만 한다는 식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현시점에 볼 때 북한의 전면전 도발 능력은 제한되나 국지도발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북한의 핵능력이 과장되었다고 판단하며 이에 기초해 대북 정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왕좌왕하다가 파국을 맞는다
이처럼 북한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둘 다 주동적인 자세에서 북한 문제의 해법을 찾고 연구한 결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미국의 힘이 아주 강해서 북한을 압도할 수 있다면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과 상관없이 그냥 힘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밀려 대북 정책이 계속 실패하다 보니 수세적 입장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저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현재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깎아내리며 무시하지도 못하는 매우 난처한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을 위협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비핵화 중간 단계’라는 정책을 들고나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북한이 이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무시하는 측에서는 ‘비핵화 중간 단계’를 실효성이 없다고 깎아내리지만 정작 자신들은 어떤 대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북한 해법에 매우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결할 시간을 놓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우리의 예상치를 한참 벗어났는데 앞으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현상 유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에는 어떤 파국에 직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사례를 봅시다.
1964년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하였고 지상군도 대규모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다 1968년 음력설을 기해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면서 미군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지휘하던 웨스트멀랜드 사령관은 본국에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증원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존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증원 요구를 거부하고 평화협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과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미국은 이길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5년이나 전쟁을 이어가다 피해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결국 의회가 전쟁을 중단시키겠다고 닉슨 정부를 압박하는 상황까지 가서야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비슷합니다.
2001년 10월 7일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한 아프간 전쟁은 두 달여 만에 승리를 공식 선언할 정도로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한 줄 알았던 탈레반은 다시 살아났고 20년에 걸친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미국 내에서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 아프간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프간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너무 커서 미군이 시내를 통과하면 거리에서 시민들이 돌을 던지는 바람에 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2011년 5월 알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면서 미국이 아프간에서 발을 뺄 절호의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아프간을 포기하는 게 아까워서 철군을 주저했습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미군 특수부대가 탄 헬리콥터가 격추되어 몰살당하고, 공병여단장(소장)이 전사하는 등 피해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2014년 5월 오바마 정부가 미군 철수를 결정했지만 아프간에서 쫓겨난 대통령으로 남기 싫었는지 이듬해 철수 결정을 번복했습니다.
뒤이은 트럼프 정권도 자기 임기 중에 철수하는 것만은 피하고자 안간힘을 쓰다 결국 2020년 2월 탈레반과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습니다.
2021년 집권하자마자 아프간 철수를 하게 된 바이든 정부는 아프간 전쟁에서 패배한 정권이라는 딱지가 붙는 게 싫었는지 5월 1일로, 9월 11일로 미군 철수 일정을 계속 연기했습니다.
그러다 탈레반의 포위망이 빠르게 좁혀오자 위기를 느낀 미군이 7월 2일 아프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야반도주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미 패배한 전쟁을 붙들고 우물쭈물하다 전 세계 앞에서 개망신당한 것입니다.
이후 탈레반이 아프간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도 미처 철수하지 못한 미군은 탈레반의 검문에 걸리자 ‘부역자 명단’을 넘겨주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혹시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더 큰 파국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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