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기소 사건은 한미 사이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정 박 미 국무부 대북정책담당 부차관보가 사임한 것을 보면 바이든 정부가 대한반도 정책 전반에 크게 실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윤석열, 바이든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어떤 식으로 공조했고 갈등을 빚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다른 나라를 방문해 그 나라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굉장한 결례입니다. 바이든이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문 전 대통령을 만나려 한 것은 북한과의 통로를 잇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2021년 1월 20일 취임한 바이든은 그때까지 북미관계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존 볼턴 백악관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2022년 1월 2일 한 기고 글에서 “(바이든 정부는) 북한에 대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1년을 보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바이든 정부는 북한이 군사 행동을 할 때마다 대화를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2022년 1월 11일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미국이 보인 태도는 바이든 정부의 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극초음속 미사일이 미국 본토로 날아오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미 서부지역 공항에 이륙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국무부는 “우리는 대화와 외교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믿고 있다”라며 북한을 향해 대화를 희망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미국 폭스뉴스가 1월 16~19일에 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이 가장 우려하는 안보 위협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꼽혔습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1월 31일 “외교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북한에 명확히 전달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이든이 절박하든 말든 북한은 대화 호소에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트럼프도 집권 초에는 북한과 대화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북미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하도록 했습니다. 북한과 제대로 된 소통 창구가 없으니 문 전 대통령을 자신의 특사 역할로 활용한 셈입니다. 그렇게 문 전 대통령이 다리를 놓아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바이든도 이걸 떠올리고 남북정상회담의 경험이 있는 문 전 대통령을 대북 특사로 보낼 구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한을 계기로 문 전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한 직전인 19일 최종 무산을 통보했습니다. 당시 윤석열이 미국에 강력히 항의해서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런데 한미관계라는 게 한국 대통령이 항의하면 미국 대통령이 말을 듣는 관계가 아닙니다. 윤석열이 항의한다고 해서 바이든이 포기할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윤석열이 뭔가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을까요? 무기를 많이 사준다거나, 삼성전자가 미국에 투자하도록 한다거나…. 하지만 바이든이 문 전 대통령을 통해 북한과 대화하려는 게 돈 때문은 아닙니다. 미국의 존립이 달린 안보 문제입니다. 이걸 돈 몇 푼에 넘길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윤석열이 뭘 가지고 바이든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문 전 대통령이 아닌 자신이 북한과 다리를 놓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트럼프 정부 때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하고 북미정상회담을 한 것처럼 자기가 먼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북미정상회담을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한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윤석열이나 국힘당 세력을 반통일 세력, 전쟁 세력이라고 여기며 남북대화나 정상회담에는 관심이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국힘당 세력이 집권했을 때도 남북대화는 진행됐습니다. 그들은 북한 붕괴와 흡수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두고 있으며 대화냐 전쟁이냐는 그저 이를 위해 선택하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책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습니다. 전쟁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그저 수단이라는 뜻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대외전략기획관으로 일했던 김태효는 당시 외교안보 실세로 꼽혔습니다. 그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인 ‘비핵-개방-3000’을 입안했다고 합니다. 한때 김태효가 중국에서 극비리에 북한 측 인사를 만나 돈봉투를 내밀며 남북정상회담을 구걸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김태효는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 국가안보실 1차장에 있습니다. 인수위 시절부터 지금까지 윤석열의 대외정책 실세로 꼽힙니다. 아마 그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북 강경론자인 김태효가 윤석열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문재인은 남북관계에서 저자세로 일관했다. 그래서 북핵 폐기에 실패했다. 우리는 반대로 가야 한다. 강경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북한을 압박해 대화로 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무릎을 꿇려야 북핵을 폐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윤석열이 바이든을 설득한 것도 똑같은 논리였을 것입니다. 아마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대단한 치적이라고 떠들지만 실제 북한 핵미사일은 하나도 없애지 못했다. 문재인에게 놀아나서 대북 저자세 외교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힘으로 북핵을 없앨 생각이다. 나에게 기회를 달라’라고 설득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문 전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나에게 힘을 실어 달라, 한미연합훈련 때 전략무기 좀 많이 보내 달라’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윤석열이 ‘선제 타격’이니 ‘힘에 의한 평화’, ‘압도적 대응’, ‘2~3배 대응’ 같은 강경 발언을 늘어놓은 것도 이런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윤석열의 대북 강경 정책을 남북정상회담만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면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윤석열은 대화를 추진하다가 안 되면 전쟁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이제 바이든은 시시때때로 윤석열에게 연락해 남북정상회담 추진 상황을 점검할 것입니다. 하지만 윤석열이 당장 내놓을 성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북한을 굴복시키려면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 핵협의그룹을 만들어야 한다, 전략무기를 수시로 보내줘야 한다’면서 점점 많은 주문을 합니다. 바이든은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해달라는 대로 해줬더니 윤석열이 ‘사실상의 핵공유를 해냈다, 사실상의 핵배치를 해냈다’며 자기 치적으로 홍보합니다.
원래 사기꾼은 처음에는 상대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요구합니다. 그러다 점점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상대는 자기가 사기당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거기에 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 만 원을 빌려주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만 원을 돌려달라고 하니 ‘지금 당장은 어렵다, 다만 지금 10만 원을 더 주면 20만 원으로 돌려줄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10만 원을 더 주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사기를 당하는 겁니다.
여기서 잠깐 김건희가 재미교포인 최재영 목사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김건희는 마치 자기가 대통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북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세간에 소문이 다 난 것처럼 김건희가 국정운영에 상당히 깊숙이 간섭하고 있다고 보면 남북정상회담 역시 김건희가 손수 챙기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윤석열·김건희라고 해서 북한과 무슨 소통 창구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가능성이 있을 만한 사람들을 물색했을 것이고 최재영 목사도 그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김건희는 최 목사가 북한에도 인맥이 있을 것으로 여기며 자기가 남북대화를 바라고 있음을 북한에 전달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건희와 최 목사가 주고받은 문자를 보면 문재인 정부 시기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이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을 탄압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건희는 “(조 장관 아내) 정경심을 구속하라고 지시한 게 문통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이를 두고 김건희가 이간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김건희가 북한을 향해 ‘윤석열은 보수가 아니다. 윤석열이 조국 장관 탄압한 건 문재인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보수세력과 대화를 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이런 작업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윤석열이 바이든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김건희가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바이든이 빨리 성과를 가져오라고 성화를 부리거나, 전략무기라도 보내달라고 바이든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김건희가 직접 나설 수 있습니다. 김건희는 워낙 사람을 후리는 재주가 있으니 바이든을 보고도 ‘저런 노인네는 내가 옆에서 팔짱 끼고 몇 번 웃어주면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지’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화가 난 바이든은 윤석열에게 뒤통수를 맞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대신 누군가 책임질 사람을 찾습니다. 일단 대북 정책을 담당한 책임자인 정 박 국무부 대북정책담당 부차관보를 날립니다. 그리고 윤석열의 대북 정책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여론을 조성한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을 기소합니다. 일종의 화풀이이자 윤석열을 향한 경고인 셈입니다. 물론 뒤늦은 경고이지요.
한편으로는 한국의 정치, 경제, 안보, 사회 전 영역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윤석열·김건희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게 잘 납득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바이든 개인이야 판단력이 흐려졌을 수 있다고 해도 그 밑에 참모들은 뭐란 말입니까. 이건 지금 미국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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