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미국으로 날아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공대지 순항미사일 스톰 섀도를 러시아 영내 공격에 쓸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라 세계가 주목했는데 회담 결과 미국이 영국의 요구를 거절한 듯합니다.
특히 지난해 9월 20일 흑해함대 해군 사령부 공격에는 스톰 섀도 8발을 발사해 러시아 측이 5발을 요격했으나 나머지 3발이 사령부 건물에 명중했다고 합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처럼 유용한 스톰 섀도로 러시아 본토 깊숙이 공격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오래전부터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요청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힘을 얻은 젤렌스키는 7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일부 장거리 무기 사용에 관한 긍정적 신호를 받기 시작했다”라면서 “만일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우크라이나는 자체 무기를 사용해 러시아를 타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무인기(드론)를 이용해 러시아 본토 깊숙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바이든은 9월 10일 우크라이나가 미국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후방 깊숙이 타격하는 것을 승인할 것이냐는 질문에 “현재 검토 중”이라며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장관도 같은 날 영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사용 제한 해제) 요청이 있으면 우리는 이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태도가 바뀐 듯해지자 스타머 영국 총리가 부리나케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회담 결과 합의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타머는 바이든을 설득했냐는 기자 질문에 답을 피했습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정상회담에 앞선 브리핑에서 미국은 제한 조치를 바꿀 계획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사브리나 싱 미 국방부 부대변인은 19일 “우리는 이 문제가 묘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라며 미사일 사용 제한을 해제한다고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이 끝내 태도를 바꾸지 않자 유럽이 발끈했습니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바이든-스타머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16일 우크라이나가 서방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을 러시아 영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개별 동맹국이 결정할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미국과 합의 없이 미사일을 제공한 나라들이 알아서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나토를 주도하는 미국과 나머지 나라들이 갈라서자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나토 사무총장이 나토를 깨자는 말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어떤 나라가 미국이 반대하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단독으로 러시아 본토 공격을 허용했다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나토의 규정에 따라 다른 나토 가입국들이 러시아를 공격해야 하는데 과연 러시아 공격에 나설 나라가 있을까요? ‘왜 우리가 동의하지도 않은 일을 해서 전쟁을 확대하냐’라며 모른 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사실상 나토는 해체되는 것입니다.
스톨텐베르그가 현실성 없는 얘기를 한 건데 그냥 바이든에게 짜증을 낸 것에 불과합니다.
스톨텐베르그는 러시아 본토를 공격했을 때 보복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쟁에서 위험이 없는 선택지는 없다”라면서 나토에 가장 큰 위험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진행되는 지난 2년 반 동안 대러 제재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었고 특히 유럽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미국에 남아도는 셰일가스를 유럽에 판매해 막대한 이득을 봤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은 엄청난 손해를 봤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을 빌미로 미국이 동맹국을 수탈한 것입니다.
유럽은 러시아와 교역이 끊기면서 가스비가 치솟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특히 물가 폭등으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프랑스는 파리올림픽을 하면서 선수촌은 물론 셔틀버스에도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아 지탄을 받았습니다. 영국은 템스강 오염을 처리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강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처지입니다. 유럽 경제를 이끌던 독일은 이제 ‘유럽의 병자’로 불릴 정도로 휘청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유럽 민심도 부글부글합니다. 유럽 내 각종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반대하고 러시아와 화해하자는 정치세력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 지원보다 러시아와 대화하는 게 효율적이라며 대러 제재를 반대한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압승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도 중도 보수 야당인 기민·기사련(CDU/CSU)이 30.0%로 1위를 기록한 가운데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5.9%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숄츠 총리가 속한 사민당(SPD)은 13.9%로 3위에 그쳤습니다.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자국민에게 ‘조금만 버텨라, 전쟁은 이긴다, 이기면 (러시아를 수탈해서) 다시 잘 살 수 있다’라고 설득합니다. 그러다 만약 전쟁에 지면 이들은 분노한 국민의 손에 이끌려 정치적 단두대에 서야 할 것입니다. 마크롱은 벌써 반쯤 끌려 나온 듯합니다. 프랑스 의회가 대통령 탄핵 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이겨보려고 뭐든 해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그래서 영국 총리가 총대를 메고 미국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젤렌스키 역시 살아남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모하다고 평가하는 러시아 본토 진격을 단행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도 미사일 제한을 안 풀어 줄 거냐’라고 시위하는 듯합니다. 미국이 미사일 제한만 풀어주면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망상에 빠져 있나 봅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보는 듯합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장관은 9월 7일 독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전쟁에서 그 자체만으로 전황을 바꿀 결정적인 한 방이라는 것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황을 뒤집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미국 내에서는 젤렌스키의 러시아 본토 진격을 두고도 비관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8월 6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쿠르스크지역을 침공할 때만 해도 무슨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전황이 일거에 뒤집힐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 반이 지난 지금은 분위기가 정반대입니다.
일단 우크라이나의 구상은 정예부대를 끌어모아 러시아 본토로 진격해 러시아가 전선 부대를 쿠르스크로 돌리게 만들어 러시아의 진격을 막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전선 부대를 빼지 않고 쿠르스크 방어에 소극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정예부대는 신나게 러시아 본토 깊숙이 진격했습니다. 그 사이에 러시아는 정예부대가 사라진 돈바스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해 진격 속도를 높였습니다.
이제 거꾸로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 전선의 정예부대를 돈바스로 되돌려야 할 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쿠르스크를 포기하자니 패배를 인정하는 거라서 쉬운 판단이 아닙니다. 설상가상 러시아가 쿠르스크를 포위하기 시작해 정예부대가 모두 날아갈 위험에 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구상대로 전황이 흘러가지 않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작전을 역으로 이용해 더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전략이 먹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8월 29일 포브스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병력 분산에 실패했고 우크라이나군 병력만 낭비했다고 평가했으며, 독일 언론은 러시아군의 돈바스지역 진격이 너무 빠르다고 개탄했습니다. 8월 30일 YTN은 「“軍 전체가 붕괴 가능성”...러 본토 노리던 우크라, 최전선 뚫릴 위기」라는 보도를 통해 한 우크라이나 병사가 “솔직히 이런 것은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무너지고 있다”라고 X에 올린 글을 소개했습니다. 또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의 군인이자 언론인인 스타니슬라프 아세예프가 “(도네츠크주의 전략적 요충지) 포크로우스크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군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라고 우려한 것도 소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왜곡 보도를 하던 한국 언론조차 등을 돌릴 정도면 정말 절망적인가 봅니다.
9월 8일 미국 CNN 방송은 우크라이나 지휘관 6명과 나눈 대담을 방영했습니다. 그들은 “탈영과 불복종이 전선에 만연해 있다”라면서 올해 초 탈영병 등에 대한 군법 회부를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만 9천 명에 달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전선의 군 장교들이 탈영병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처벌하지 않을 테니 부대에 복귀하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탈영 초범일 때는 처벌을 하지 않도록 규정을 개정하는 고육책까지 썼다고 합니다.
도네츠크 전선에서 전투 중인 우크라이나 장교 안드리 호레츠키는 “참호에서 하루 종일 쏘지 않으면 러시아군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가 너무 길다”라고 말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일부 우크라이나 장교는 우크라이나 군인 1명당 러시아 군인 10명이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추가 징집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징집 연령을 낮추고 18살 이하 남성의 자원입대도 허용하고 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BBC는 지난 6월 18일 우크라이나 현지 보도에서 하객이 대거 빠진 결혼식을 소개했습니다. 징병관에게 붙잡힐까 봐 남성 청년들이 친구 결혼식에 가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한 청년은 징병관이 ‘노상강도’와 같다고 말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식당, 마트, 공원도 못 간다며 “마치 감옥에 갇힌” 느낌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급기야 징병관 집에 폭발물을 던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침공은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며 나토의 지원을 더 끌어내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토 사무총장이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도록 미사일 제한을 풀자고 주장하는 것도 뭔가 필승의 전략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 하니 뭐라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나저나 미국은 대체 왜 나토 주요 동맹국들이 이 정도로 절박하게 요청하는 러시아 본토 공격 승인을 거부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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